"엄동설한에 이게 무슨 난리야"...붕괴위험에 강제퇴거된 대종빌딩 사람들

입력 2018.12.12 18:44

"공식적으로 안내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갑자기 나가라고 하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모르겠네요. 답답합니다."

12일 오전 10시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오피스텔 대종빌딩 1층 입구.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 짐을 옮기는 입주민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PC와 모니터, 가구 등을 층층이 쌓아 조심스레 카트에 싣는 사람도, 복도에 박스를 한가득 쌓아놓고 짐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갑자기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이 빌딩 15층 수출입 업체에서 근무하는 김모(42)씨는 "오늘 오전까지 아무런 안내도 없었는데, 곳곳에서 나가야된다는 소문이 들렸다"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직원들이 너무 불안해해서 짐을 싸게 됐다"고 했다.

12일 오후 1시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대종빌딩 9층에 위치한 한 회사 직원들이 컴퓨터 등 사무실 집기를 카트에 싣고 임시 사무실로 옮기고 있다. /박소정 기자
서울 강남구는 이날 오전 11시쯤 이 빌딩 입주민들에게 "12일 자정까지 모두 퇴거하라"고 고지했다. 입주민 퇴거명령과 함께 시설물 사용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백주대낮에 멀쩡한 빌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흘 전인 지난 8일 이 빌딩 2층에 입주하는 한 회사가 인테리어 공사 도중 건물 기둥이 심하게 파손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빌딩 관리사무소에 알렸다. 관리사무소는 강남구청에 신고한 뒤 안전진단을 의뢰했고, 강남구는 서울시와 합동으로 점검한 결과 붕괴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퇴거조치 결론을 냈다. 점검 결과 대종빌딩의 안전등급은 최하인 ‘E등급’이었다고 한다.

서울시와 강남구는 빌딩 관리사무소 측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으나 관리사무소 측은 행정명령을 고지하기 전까지 입주민들에게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날벼락 맞은 입주민들…옆 건물까지 아수라장
이날 아침 대종빌딩은 대혼란이었다. 겁에 질려 도망나오는 사람에서부터, 급하게 짐을 옮기는 사람, "큰일났다"며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까지 빌딩 전체가 북새통이었다. 오전 11시쯤부터는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입주민 행렬이 이어졌다.

대종빌딩은 1991년 준공돼 이날까지 중소기업과 법률사무소, 상가 등 90여곳이 입주해 있었다. 지상 15층, 지하 7층, 연면적 1만4000㎡ 규모로, 이날 오전까지 이 곳에서 근무하거나 드나든 사람만 어림잡아 수백명에 이른다.

이미 하루 전 ‘위험 진단’이 내려졌는데도, 이 빌딩 지하주차장과 엘리베이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건물 내 상가를 찾은 시민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일부 입주민들은 복도에 나와 "아무 연락도 못받았는데 다들 왜 이러느냐. 누가 알면 이야기 좀 해 달라"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대종빌딩에 있는 한 회사의 모습. 붕괴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 직원이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다. /박소정 기자
갑자기 대종빌딩 입주민들이 퇴거하게 되자, 인근 부동산중개업소들까지 덩달아 붐볐다. 급하게 새 사무실을 알아보느라 부동산중개업소에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며 빈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김모(62)씨는 "보증금과 이사 비용 등이 막막하기도 하지만, 당장 일을 해야하니 사무실을 구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했다. 부동산중개사 이모(52)씨는 "오늘만 대종빌딩 입주민 5~6팀이 다녀갔다. 이 부근에 빈 사무실이 거의 없어서 안타까워 보였다"며 "한 고객은 아직 보증금을 못받아서 외상으로라도 계약하게 도와달라고 조르기도 했다"고 했다.

12일 찾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대종빌딩의 모습. 오후 1시 건물 1층에는 재난현장 통합지원본부가 설치됐다. /박소정 기자
대종빌딩 부근 건물에 입주한 직장인들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옆 빌딩에서 근무하는 정모(42)씨는 "바로 옆 건물이다보니, 신경쓰이고 불안하다"며 "건물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혹시라도 붕괴되면 우리 사무실을 덮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옆 건물 입주예정자인 박준(44)씨는 "6층에 병원을 개원하려고 인테리어 공사까지 끝냈는데, 혹시나 개업도 하기 전에 대종빌딩이 붕괴되거나 할까봐 영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13일 0시, 건물 입출입 금지…
서울시와 강남구의 퇴거·조치로 0시 이후 부터는 건물 사용이 불가능해 진다. 또 시설물 사용 제한으로 입·출입도 금지다. 박중섭 강남구 건축과장은 "0시 이후 특별법에 따라 건물 사용이 제한되고 불응시 조치할 수 있다"며 "오늘 짐을 못 뺀 사람들에게는 이후 공무원과 동행해 마저 뺄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건물 사용이 금지되면서 건물주와 입주업체 등의 경제적 피해도 예상된다. 갑작스런 퇴거명령에 입주업체는 이주할 사무실을 구하지 못한 상태다. 전자장비를 비롯한 시설물과 보증금 등이 묶이거나 이주비용이 필요하다. 건물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건물의 안전 등을 문의하는 입주민들의 민원이 쏟아져 정신이 없다"며 "아직 보상안에 대해서는 얘기나온게 없어,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는 상태"라고 했다.

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대종빌딩 2층 중앙 기둥의 모습. 기둥의 콘크리트가 부서져있고 철골 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바닥에도 균열이 보인다. /박소정 기자
입주자들의 불만이 제기되자, 강남구는 이날 오후 2시 비공개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 현장에서는 입주업체 대표와 입주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10층에서 증권 관련 업체를 운영하는 도모씨는 "구청 측에서 건물 위험도와 차단만 얘기한다"며 "보증금이나 이사비용 등 현실적인 얘기는 회피하고 있다. 퇴거로 인해 임차인들의 반발이 심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강남구청 관계자는 "민간 건물이라 법적으로 보상해줄 근거가 없다"며 "다만 관내 이슈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원하고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서울시와 강남구는 대종빌딩에 대한 정밀 안전진단에 나설 방침이다. 먼저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주요 부위에 지지대를 설치해 하중을 분산하겠다는 계획이다. 이후 안전진단을 통해 건설의 지속가능 여부를 점검할 방침이다. 안형준 한국초고층도시건축학회 회장은 "기둥과 그 안에 들어있는 수직철근의 역할이 중요한데, 피복과 콘크리트가 다 탈락돼있었다."며 "2층의 위험이 노출됐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상태이며, 건물 붕괴의 전조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층 기둥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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