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도 인생도 영글어야 더 맛있다

조선일보
  • 표태준 기자
    입력 2018.12.07 03:00

    다큐 영화 '인생후르츠'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후르츠(Life is fruity·후시하라 겐시 감독)'는 황혼(黃昏)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답안이다. 2014년 촬영 당시 90세였던 쓰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 쓰바타 히데코 할머니의 일상을 2년간 촬영했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는데 영화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이 시대에 욕심은 버리고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중으로 삶을 채워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놀랍고 생경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2016년 TV다큐멘터리로 방영됐다가 반응이 뜨거워 지난해 영화로 개봉했다. 독립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2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1년 넘게 장기 상영하는 극장까지 생겼다. 한국에서는 6일 개봉했다.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통나무집에 사는 노부부는 텃밭에서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기른다. 텃밭 여기저기 귀여운 표지판들이 길을 안내한다. 밀감 옆에는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대나무 옆에는 '죽순아 안녕', 작약 옆에는 '미인이려나?' 같은 식이다. 재배한 과일과 채소는 정성스레 포장해 이웃에게 나눠준다. 남은 수확물로 딸기케이크·푸딩·경단·잼 등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

    슈이치씨가 밭일하다 나뭇가지에 찔리자 아내 히데코씨가 연고를 발라주고 있다. 노부부는 인생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워짐을 몸소 보여준다.
    슈이치씨가 밭일하다 나뭇가지에 찔리자 아내 히데코씨가 연고를 발라주고 있다. 노부부는 인생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워짐을 몸소 보여준다. /엣나인필름
    카메라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 하는 노부부를 90분 동안 지켜보기란 지루한 일이다. 이를 잘 아는 감독은 영리한 편집으로 관객의 오감을 일깨운다. 텃밭에서 갓 딴 싱싱한 과일과 채소, 계절이 바뀌는 풍경 등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눈으로 보고 있건만 코끝에도 과일 향이 간지럽다. 정갈하고 싱그러운 쾌감이다.

    집은 삶의 보석 상자

    할머니는 '물건에서 사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의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종업원에게는 감사 편지를 전한다. 건축가였던 할아버지는 책 출판과 건축 설계 제안이 계속 들어오지만 모두 거절한다. 대신 비용 한 푼을 못 받는 정신병원 설계에는 흔쾌히 참여한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게 이유다.

    슈이치씨가 밭일하는 히데코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밭에서 갓 재배한 커다란 오이를 들며 웃는 히데코씨.
    슈이치씨가 밭일하는 히데코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밭에서 갓 재배한 커다란 오이를 들며 웃는 히데코씨.

    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토록 영글었을까. 영화는 관객을 과거로 데려간다. 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된 대만 10대들과 함께 비행기를 만들었다. 해군 숙소에서 대접받으며 지낼 수 있었지만, 대만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에 닭장 같은 징용자 기숙사를 자원해 들어갔다. '집은 삶의 보석 상자'라는 철학을 가지게 된 할아버지는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건축가가 됐다. 1960년대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 계획에 참여하며 집과 자연이 공존하는 마을을 설계하지만 개발 논리에 밀려 닭장 같은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서고 만다. 실패를 겪은 부부가 택한 선택은 재산을 털어 뉴타운 옆에 300평 넓이 공터를 사들이는 것. 통나무집을 짓고 살며 나무를 심고 텃밭을 가꿨다. 작지만 큰 저항이다. 50년이 지났고, 공터는 새들이 날아드는 도시의 보석 상자가 됐다. 이들의 삶을 '힐링'이란 상투적인 단어로 섣불리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최고의 여자친구

    두 사람의 지혜로운 대화를 엿듣는 건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다.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편지 주기를 좋아한다. 편지지에는 할아버지가 '내 최고의 여자친구'라는 글귀와 함께 그려넣은 부부 캐리커처가 웃고 있다. 엄격한 가문에서 자란 할머니는 고민이 생기면 남편에게 "해도 될까?"라고 묻는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하는 건 다 좋은 것"이라고 답한다. 슬픔이 덮쳐올 때 노부부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한다. 할머니는 가슴이 무너질 때도 "눈물은 금물"이라며 울음을 한껏 머금은 채 미소 짓는다. 과일도 단풍도 꽃도 인생도 벼락과 빗물 끝에 무르익는다. 언제나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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