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뉴스 저격] 젊은 독재자의 호탕한 웃음, 대중은 어제의 暴政을 잊는다

입력 2018.12.07 03:13

외국 유학 신세대니까 아버지와는 다르겠지? '세습 군주'에 대한 환상

"정상회담을 통해 보인 (김정은의) 모습은 겸손하고 배려심 많고 결단력 있고 배짱 좋고 실력 있는 지도자였다. 나이를 떠나 진정 위대한 인물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집회를 연 이른바 '위인맞이환영단'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을 환영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앞서 열린 백두칭송위원회 광화문 집회 참석자도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모습은 김 위원장의 본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모부를 고사총으로 쏴 죽이고, 이복형을 독극물로 암살한 김정은의 행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제(專制) 군주의 전형적인 방식이지만, 우리 국민 일부는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보여준 호탕하고 활달한 모습에 환호한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매력적이고 잘 배운 젊은 독재자에 대한 환상이 한국 땅을 배회하고 있다"며 "우리 국민 일부가 독재자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 세습 독재자와 그 후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통치 행태를 살펴본다.

◇의사 출신 영국 유학생에서 시리아 철권 통치자로

2000년 시리아 국민들은 35세의 젊은 신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쏟아낸 파격적인 취임 연설에 귀를 의심했다.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중략) 정치제도를 개혁하려면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줄 것이다." 새 지도자는 자기 말을 입증하려는 듯 "건설적인 비판을 허용하겠다"며 정치범 수백 명을 석방했다. 국영기업 민영화와 부패 척결 등 개혁 조치도 취했다. 아사드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가 자행한 학살과 철권통치에 신음해 온 시리아 국민들은 열광했다. 의대를 나오고 영국에서 유학한 지도자가 펼칠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부풀었다. 이른바 '다마스쿠스의 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민주화 분위기에 고무된 각계 인사 99명이 '다마스쿠스 선언'을 발표하고 검열 폐지 등 추가 개혁을 촉구하고 나서자 불안을 느낀 아사드 대통령은 돌변했다. 집권 이듬해 자신을 반대하는 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한 아사드는 사실상의 공개투표로 97.6% 지지를 받아 재선하며 영구 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세계의 주요 독재자 2~3세 그래픽

2011년 '아랍의 봄'에 자극받아 국내에서 반정부 투쟁이 시작되자 아사드는 화학무기로 반군은 물론 민간인까지 무차별 살상했다. 영국의 명문 킹스칼리지를 졸업하고 JP모건에서 투자분석가로 일했던 부인 아스마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활발한 자선 활동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시리아의 다이애나'란 명성까지 얻었지만 '아사드 왕국'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남편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사우디 개혁 깃발 든 빈 살만, 王朝 비판엔 탄압으로 대응

지난해 사우디 왕세자로 책봉된 무함마드 빈 살만은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의 탈바꿈을 목표로 '비전 2030'을 추진하고 있다. 홍해자유관광지구와 남부 알키디야 지역 엔터테인먼트시티 개발, 서울 44배 크기의 미래 신도시 네옴(NEOM)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여권(女權) 신장에도 앞장서 여성의 운전을 허용했고 작년 9월 건국 85주년 기념 축구대회엔 사상 처음으로 여자와 남자가 함께 축구 경기를 관람하게 했다. 제다와 리야드에서 열린 그리스 음악가 야니 콘서트도 남녀가 현장에서 함께 즐겼다. 빈 살만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을 만나며 사우디 전통 의상 대신 노타이와 양복 차림으로 나타나 서구적 지도자란 이미지도 심었다.

과감한 개혁의 배경엔 2014~15년 유가 폭락이 있었다. 국제 유가가 50% 급락하며 정부 예산이 15%나 깎이고 각종 보조금이 삭감되며 통치 위기가 대두되자 '석유만으론 미래가 없다'며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빈 살만의 개혁은 '통치자가 베푸는 선정(善政)'이라는 울타리를 넘을 수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며 사우디 왕실의 진짜 개혁을 촉구해 온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은 전제적 통치자가 추진하는 개혁의 본질과 한계를 드러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우디 같은 전근대 국가에선 개혁 군주라 해도 권력 유지를 위해 억압에 의존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논문 쓴 카다피 아들, 리비아 국민 봉기에 "피가 강물 이룰 것" 협박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으로 몰락한 리비아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의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은 독재 왕조의 후계자가 평소 보여주는 친근하고 개혁적인 이미지가 거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가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글로벌 거버넌스 기구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반(反)카다피 시위가 발발하자 TV에 등장해 "피가 강물을 이룰 것"이라고 국민을 협박했고 반군이 장악한 도시 벵가지를 전투기로 폭격했다. 사치도 즐겼다. 런던 북부에 영화관과 수영장이 딸린 2000만달러짜리 호화 저택을 소유했으며, 팝스타 머라이어 케리와 비욘세 등을 개인 파티에 초청하느라 수백만달러를 뿌렸다.

"남한의 소설·영화·음악은 썩었다"는데… 김정은에 취한 우리 문화계

올해 10월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오른 연극 '모텔 판문점'은 남과 북의 청춘 남녀들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사랑의 축제를 벌이는 내용이다. 이들은 북이 파놓은 땅굴에서 사랑을 나누고,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항의의 뜻으로 판문점에 모여 사랑의 축제를 펼친다.

서울시 옛 청사에 마련된 서울도서관은 올 11월에 '평화가 시작되었다' 특별전을 개최하고 '북한 이해, 평화의 시작입니다' 등 4개 주제로 나눠 관련 도서를 전시했다. 서울 연남동에선 서울시립미술관 지원으로 '북조선 판타지' 전시회가 열렸다.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맞는 시민의 행복한 상상을 촉진한다는 취지였다.

미술 전시 ‘북조선 판타지’에 전시된 김정은 피겨(왼쪽). 오른쪽은 EBS미디어가 내놨다가 논란이 일자 판매를 중단한 김정은 종이 인형.
미술 전시 ‘북조선 판타지’에 전시된 김정은 피겨(왼쪽). 오른쪽은 EBS미디어가 내놨다가 논란이 일자 판매를 중단한 김정은 종이 인형.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김정은을 귀엽게 묘사한 피겨가 제작되고 캐릭터 상품도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 1인 독재자 김정은과 북한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반면 북한의 대남 예술관은 일관되게 부정적이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힘으로 부르주아 반동 문화를 짓눌러버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후 한류와 K팝, 남한의 문학예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춤을 '색정적'이라며 단속한다. 올 3월 양강도에서 우리 가요에 맞춰 춤을 춘 청소년 6명을 반(反)국가음모죄로 처벌했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이 펼쳐지던 올 4월 1일 '모순과 대립의 격화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소설·영화·음악·무용·미술 등은 모두 썩어빠진 부르주아 생활 방식을 유포해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참고한 책: 걸프를 알다(엄익란), 독재자의 자식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정규식 등), 시리아:아사드 정권의 40년사(구니에다 마사키) 등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