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8] 유럽과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그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조선일보
  • 세우타=송동훈
    입력 2018.11.29 04:10

    모로코에 있지만 스페인 땅 세우타

    송동훈 기자

    모든 해협은 관문이 둘이다. 지브롤터 해협의 관문은 유럽의 지브롤터와 아프리카의 세우타다. 해협은 좁다. 가장 가까운 곳 너비가 13㎞에 불과하다. 양안(兩岸)의 전략적 가치는 그래서 무궁무진하다. 뱃길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으니까. 배를 타고 해협을 직접 건너가 보면 얼마나 가까운지를 몸으로 느낀다. 세우타로 가는 일반적 방법은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페리를 타는 것이다. 알헤시라스는 군사 지역인 지브롤터 서쪽 맞은편에 있는 항구다. 스페인에서 1~2위를 다투는 대형 항구다. 두 대양과 두 대륙의 접점이란 입지 때문이다.

    거대한 페리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세우타(Ceuta)에 도착한다. 아프리카다! 바다를 돌아보면 지척에 스페인 해안이 펼쳐져 있다. 너무나 다른 두 대륙 사이에 놓인 시공(時空)의 간극이 참으로 하찮다. 그 하찮음은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펴왔다. 그 결과 해협 주변의 소유권은 복잡해졌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땅에 있지만 영국령이다. 세우타는 모로코에 있지만, 주인은 스페인이다. 전략적 요충지의 운명이다.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항구

    세우타는 유럽과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다. 지브롤터는 칼처럼 남쪽을 향해 찌르는 형태다. 세우타는 방패처럼 동서로 누워 그 칼을 막는 모양새다. 절묘한 배합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세우타와 지브롤터는 영웅 헤라클레스(Hercules)가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로막고 있는 산을 쪼갤 때 생겨났다. 신화의 한순간을 세우타 사람들은 조각으로 남겼다. 페리 선착장에서 동쪽으로 1200m쯤 떨어진 곳에 가면, 언덕 위에 거대한 헤라클레스가 양 손으로 두 기둥을 밀어 세우고 있는 조각군(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헤라클레스 기둥(Pillars of Hercules) 중 하나란 것을 은유한 것이다. 다시 서쪽으로 요새 쪽으로 난 인도를 걷다 보면 이름이 익숙한 반신상(半身像)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트라본, 폼포니우스 멜라….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지리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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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는 권력인 동시에 권력을 향한 의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세우타를 차지한 후 이곳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요새를 세웠다. 한때 비잔틴 제국, 또 한때 이슬람 왕국들의 요새 위에! 그렇게 지중해를 지배했던 제국마다 자기들의 의지를 이곳에 남겼다. 지금 요새 위에서 나부끼는 것은 스페인 깃발이다. 스페인은 언제까지 지브롤터 해협의 한 축인 세우타의 주인일까? /게티이미지뱅크
    공통점은 세우타를 자신의 책에 남겼다는 것이다. 세우타의 존재가 신화에서 역사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반신상의 열(列)이 끝나는 곳에서 요새가 시작된다. 요새는 거대하고 육중하며 단호하다.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을 듯하다. 수백 년에 걸쳐 포르투갈 사람들이 만들었고, 스페인 사람들이 더했다. 세우타는 스페인 코앞이다. 그런데 왜 유럽식 요새의 첫 건설자들이 포르투갈 사람들일까? 역사의 시곗바늘을 600년 넘게 과거로 되돌리면 답이 나온다.

    포르투갈의 국가 프로젝트

    "선수(船首)를 남쪽으로!"

    우렁찬 외침과 함께 대함대가 일제히 출항했다. 1415년 7월 25일 리스본 항구. 1411년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훗날 스페인의 주축이 되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4년 가까이 포르투갈이 국력을 총동원해 진행해 온 대프로젝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200척이 넘는 다양한 배로 구성한 대함대의 선두에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Joao·재위 1385~ 1433년)와 그의 장성한 세 아들, 두아르테(Duarte·1391~1438년), 페드로(Pedro· 1392~1449년), 엔히크(Henrique· 1394~1460년)가 섰다. 왕실 주요 구성원 전원(全員) 참전. 이 원정에 운명을 걸었다는 포르투갈 왕실의 의지를 내보이기에 충분하다. 군대 규모도 2만명이 넘었다. 포르투갈인이 중심이었지만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기사들과 용병들이 포함돼 있었다. 함대의 최종 목적지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전략적 요충지인 동시에 교역의 중심지였다. 스페인 남부에 버티고 있는 무슬림 최후 왕국, 그라나다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이 이곳을 목표로 한 이유다.

    포르투갈은 원래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졌던 십자군 전쟁 와중에 탄생했고(1139년), 성장했다. 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숙명이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국토 회복 운동)는 13세기에 일찌감치 끝났다. 그 후 백 년은 이웃 국가인 카스티야와 벌인 무의미한 영토 분쟁이었다. 분쟁이 끝나자, 국가의 축적된 에너지를 쏟아부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주앙 1세는 세우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 모로코를 지배하고 있던 마리니드(Marinids) 왕조의 내분이 왕의 야망을 부채질했다. 대함대는 포르투갈 남부 라고스(Lagos)에 집결, 공격 시기를 엿봤다.

    대항해 시대의 리더 탄생

    세우타와 지브롤터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한날한시에 태어났다. 세우타 시내 한편에 세워진 거대한 조각은 신화의 그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세우타와 지브롤터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한날한시에 태어났다. 세우타 시내 한편에 세워진 거대한 조각은 신화의 그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8월 21일 아침, 포르투갈 함대는 세우타의 방어막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급습했다. 전투는 요새에 대한 대대적 포격으로 시작됐다. 포르투갈은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대포를 배에 실어 이곳까지 날랐다(아라곤왕 페르난도에게 전달된 1415년 9월 13일 보고서). 중세 전투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러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결정적 요인은 무기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누구보다 왕자들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욕심이 컸다. 왕위 계승권자인 두아르테는 몸소 상륙작전을 이끌었다.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이는 셋째 왕자 엔히크였다. 그는 공격의 선두에 섰고, 성문이 부서지자 가장 먼저 성 안으로 내달았다. 용맹을 넘어서는 무모함이었지만, 방어하던 무슬림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공격군의 사기를 올리기에는 충분했다. 13시간의 쉼 없는 공격 끝에 세우타는 정복됐다.

    주앙 1세는 세 아들을 기사(騎士)로 서임함으로써 그들의 용맹을 만천하에 알렸다. 장차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이끌 '항해 왕자' 엔히크는 바로 이때 탄생했다. 또한 왕은 세우타를 지켜 포르투갈 땅으로 만들겠노라 선언했다. 궁정의 일부는 반대했다. 무슬림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땅을 지키는 데 들어갈 막대한 돈과 인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왕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9월 초 왕과 본진(本陣)은 귀국했다. 3000명의 결사대가 뒤에 남았다. 그들은 적의 요새 위에 자신들의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스페인에 빼앗긴 열쇠

    세우타와 지브롤터 지도

    요새는 권력의 상징이며 의지다. 1415년에 세우타를 차지한 이래로 포르투갈은 지브롤터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이 '황금 열쇠'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요새를 만들고, 거기에 의지해 지켜낸 것이다. 1580년 포르투갈의 왕좌를 스페인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가 차지했을 때 세우타도 함께 넘어갔다. 훗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1640년). 그러나 세우타까지는 되찾지 못했다. 스페인은 요새에 의지해 세우타를 내놓지 않았고, 포르투갈에는 빼앗을 힘이 없었다. 세우타를 향한 스페인의 야망은 무슬림으로부터 이곳을 정복한 포르투갈의 그것과 같았다.

    두 나라는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요새를 확장했다. 땅을 파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요새를 기점으로 한 세우타 동쪽을 아예 섬으로 만들었다. 육지를 끊어 섬으로 만드는 결기에 의지해 스페인은 아직까지 세우타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요새 안쪽에서는 발굴 공사가 한창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왕조들의 요새 위에 자신들의 요새를 세웠기 때문이다. 요새 위에서 수십m 파 내려간 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과거의 흔적은 아련하지만 그때의 영화(榮華)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이 8m 안에 비잔틴, 이슬람, 포르투갈, 스페인의 성벽이 존재한다. 세상에 없는 곳이다."(페르난도 비자다 박사) 발굴 총책임자인 고고학자 말이다. 동의한다. 지하 세계를 나와 요새 남쪽에 서면 모로코 해안과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광경을 보면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가톨릭·이슬람·유대·힌두… 관용과 공존의 땅 세우타

    세우타 중심에는 이곳 출신으로 저명한 지리학자 알-이드리시(Al-Idrisi·1100~1165)를 기리는 광장이 있다. 그의 동상 뒤편에는 오늘의 세우타를 상징하는 거대한 벽화가 있다.

    세우타를 상징하는 벽화에 그려진 네 종교의 상징들. 이 도시가 관용과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벽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색색의 'Ceuta' 문자 아래 놓인 종교적 상징들이다. 가톨릭의 십자가, 이슬람의 초승달과 별, 유대교의 다윗의 별, 힌두교의 산스크리트어 '옴'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왜? 세우타의 고고학자 페르난도 비야다(Fernando Villada)의 설명은 이렇다. "주민 대다수는 가톨릭교도와 무슬림이지만, 소수의 유대인과 인도인도 함께 살고 있다. 이곳은 관용과 공존의 땅이다." 세우타는 언제까지 지금의 관용과 공존을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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