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우르르… 브렉시트에 파리가 씨익~ 웃는다

입력 2018.11.26 03:00

금융중심, 런던서 파리로

파리=손진석 특파원
파리=손진석 특파원
지난 21일 파리 서쪽 외곽의 부촌(富村)인 뇌이쉬르센의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 요즘 이 지역 아파트 시세를 묻자 알렉시아라는 직원은 "작년 초 대비 10%쯤 올랐지만 매물이 나오면 금세 팔려나간다"고 했다. 알렉시아가 "요즘 인기 끄는 스타일"이라며 소개한 아파트는 침실 두 개에 화장실은 하나뿐인 107㎡(32평형)짜리였다. 가격은 123만유로(15억8400만원)였다.

뇌이쉬르센은 불로뉴숲과 센강을 끼고 있어 인기 주거지로 꼽히는데, "브렉시트가 아파트값을 더 올려놨다"는 말이 나온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가 다가오면서 런던에서 넘어오는 글로벌 기업 임직원들이 이 동네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슬로제에 따르면 뇌이쉬르센의 올해 평균 아파트 매매가는 ㎡당 1만344유로(1333만원)로 1만유로를 돌파했다. 알렉시아는 "런던에서 넘어오는 고소득자들 때문에 이 지역 아파트값이 더 올라갈 것 같다"고 했다.

◇브렉시트 피해 인력·투자금 파리행

브렉시트가 4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파리가 방긋 웃고 있다. 유럽의 금융 허브로 독보적 지위를 누리던 런던의 위상 저하로 올해 들어 고급 인력과 투자금이 부쩍 파리로 몰려들고 있다. '브렉소더스(Brexodus·기업과 인력의 영국 탈출)'의 반사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돈도,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우르르… 브렉시트에 파리가 씨익~ 웃는다
/일러스트=박상훈
모건스탠리는 지난 9월 크레디스위스 런던사무소 임원이던 프란체스코 폰티를 파리사무소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브렉시트로 인해 폰티는 회사와 근무지를 동시에 바꾸게 된 셈이다. 파리에서 170명이 근무하는 미국의 시티은행은 100명 이상 인력을 늘릴 예정이다. 개선문 근처의 시티은행 사무실은 이미 포화 상태에 달해 새로운 빌딩을 알아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는 최근 영국 근무 직원들에게 나눠준 브렉시트 안내 책자에 '파리에서 살고 일해야 하는 이유'라는 코너를 게재했다.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과 요리사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었다. BOA·메릴린치는 4500명에 달하는 영국 직원 중 400명을 파리로 이주시킬 예정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국의 블랙록은 지난 7월 유럽·아시아의 대체투자(주식·채권 이외 투자)를 총괄하는 본부를 신설하면서 런던을 제치고 파리를 선택했다. HSBC·JP모건 등 다른 글로벌 금융회사들도 마찬가지 행보를 보인다. 글로벌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브렉시트를 계기로 14개 대형 금융회사에서만 2000명이 런던에서 파리로 옮길 것으로 내다봤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장관은 "앞으로 파리가 유럽의 금융 중심지를 맡는다"고 큰소리친다.

투자금도 런던 대신 파리로 흘러들어오는 흐름이 뚜렷하다. 올해 회계법인 언스트영이 502개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투자 매력지수 조사'에서 외국인이 투자하기에 가장 좋은 유럽 도시로 응답자의 37%가 파리를 꼽아 34%가 지목한 런던을 제쳤다. 2003년부터 실시된 이 조사에서 파리와 런던의 선호도가 역전한 것은 처음이다. 불과 4년 전인 2014년만 하더라도 런던이 54%, 파리가 29%였지만 순식간에 뒤집힌 것이다. 언스트영은 "브렉시트에 대한 불안감으로 파리에 대한 투자 매력도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런던·파리 수퍼리치 숫자 처음 역전

투자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유럽 도시 역전 외
글로벌 기업 임직원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부호들도 요즘엔 런던보다 파리를 선호한다. 단적으로 두 도시의 '수퍼 리치' 숫자가 처음으로 역전됐다. 글로벌 리서치회사 '웰스―X'가 지난 9월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3000만달러(339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수퍼 리치가 파리에 3950명 사는 것으로 조사돼 3830명인 런던보다 많았다. 이 조사가 실시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부자가 제일 많은 유럽 도시'가 런던에서 파리로 바뀐 것이다. 전년도만 해도 런던의 수퍼 리치가 3630명으로 파리(3440명)보다 많았다. 요즘엔 런던을 선호하던 중동 부호들이 파리를 눈여겨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호화 부동산 중개업체 홈헌트는 작년 상반기에 중동 부호들의 파리 주택 구입 문의가 90건이었는데, 올해 상반기에는 200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파리의 매력이 더 커질 것으로 내다보는 중동 부자들이 개선문, 에펠탑과 가까운 파리 16구의 고급 주택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최근 홈헌트는 16구에 있는 1850년대식 방 6개짜리 타운하우스가 1030만유로(약 133억원)에 거래됐다고 밝혔다.

◇마크롱의 노동 개혁 주효

파리가 들썩거리는 건 단지 브렉시트에 따른 반사 이득뿐만은 아니다. 작년 5월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투자 유치를 위해 발벗고 뛰는 것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를테면 블랙록이 파리에 대체투자 본부를 두기로 결정한 과정에서 마크롱이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해 공을 들인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구글·페이스북·삼성전자는 AI(인공지능) 연구센터를 파리에서 가동 중이거나 설립할 예정인데, 이 회사들의 경영진이나 임원을 마크롱이 직접 만나 투자를 요청했다.

게다가 마크롱이 부유세를 대폭 줄이면서 스위스 등 인근 국가로 이주했던 프랑스 부호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는 것도 파리에 생기가 도는 요인이다. 일간 르피가로는 "프랑스의 고질적인 고용 경직성이 마크롱식 노동 개혁으로 상당 부분 완화된 점도 파리의 매력이 커진 이유"라고 했다. 마크롱이 자녀 교육에 관심 많은 해외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중 언어 수업을 하는 학교를 대폭 늘리라고 지시한 것도 파리의 경쟁력을 높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리가 각광받고 있지만 런던의 위상이 마냥 무너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화려한 금융 중심 도시로 200년 이상 기반을 닦았고, 영어권이라는 장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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