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색상만 다를 뿐 긴 재킷에 바지 정장 차림을 고수했다. 패션지 보그가 '국회 의사당 복장(Capitol Hill clothing)'이라고 이름 붙인 이 스타일은 그동안 미 여성 정치인과 여성 기업인의 전형적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이번 중간선거에서 여성 의원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런 패션 공식에 변화가 일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 중간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이 약진하면서 이들이 '의회 유니폼(congressional uniform)'에서 탈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6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여성 연방의원 당선자는 11일 현재까지 개표 상황에 따르면 상원 23~24명, 하원 102~109명으로 집계된다. 기존 상원 23명, 하원 84명을 훌쩍 뛰어넘는 역대 최대치다. 상·하원 의원 535명 중 여성 비중도 20%에서 23~25%로 늘 전망이다. 여성 주지사도 6명에서 9~10명으로 늘어난다.

지난 6일(현지 시각) 열린 미국 중간선거에서 미 최초의 여성 원주민 하원의원이 된 샤리스 데이비스가 당선 결과가 발표된 뒤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과거 고위직에 진출한 미국 여성들은 대체로 노출이 적은 정장 차림을 입었지만, 데이비스는 이날 성소수자임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스카프와 격투기 훈련으로 다져진 팔 근육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공식 석상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도 "그간 고위직 여성의 드레스코드는 '남자들과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었는데, 올해 여성 돌풍 속에 이 공식이 깨지고 있다"고 했다. 1970년대 후반 여성의 사회 진출과 더불어 정착된 '파워 슈트(power suit)'는 어깨 패드가 들어간 짙은 색 양복 재킷에 노출이 거의 없도록 바지나 무릎길이의 검은색 치마를 입고 진주·금 목걸이나 브로치, 핸드백 등으로 약간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들게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이 그 전형이다.

그러나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양적으로 확대되면서 파워 슈트 강박을 벗고 여성성이나 민족적 뿌리, 종교 등 개성을 공식 석상에서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캔자스에서 최초의 여성 원주민(인디언) 하원의원이 된 샤리스 데이비스(38·민주당)가 대표적이다. 레즈비언인 데이비스는 6일 개표 현장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스카프에 격투기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질 팔뚝을 드러낸 타이트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여성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민소매를 입은 전례는 거의 없다. 성적 매력이 너무 부각되거나 팔 근육으로 남성 유권자들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터부 때문이다. 미셸 오바마가 퍼스트레이디 시절 팔뚝을 드러낸 민소매를 입고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지난 6일 밤 의회 선거 승리를 확인하는 여성 당선자들. 왼쪽부터 생머리에 밝은 캐주얼 차림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테즈(29) 뉴욕 하원의원, 무슬림 히잡에 검은 매니큐어를 매치한 일한 오마르(37) 미네소타 하원의원, 보수적인 진주 목걸이 대신 흰 꽃목걸이를 건 아야나 프레슬리(44) 매사추세츠 하원의원이다. 맨 오른쪽은 2016년 대선 당시 고급스럽고 점잖은 바지 정장을 고수했던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 모습이다.

매사추세츠 첫 흑인 여성 하원의원이 된 아야나 프레슬리(44·민주당)는 6일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창안해 미 퍼스트레이디들이 확립한 현대 여성 정장의 정석인 '검정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 조합 대신 '검정 원피스에 하얀 꽃 세 송이가 박힌 목걸이'를 걸고 나와 "여성 정치를 재해석했다"는 평을 들었다. 고위직 흑인 여성들에게 금기시됐던 레게 머리도당당하게 하고 나왔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으로 첫 무슬림 여성 하원의원이 된 민주당의 일한 오마르(37·미네소타)는 검은색 히잡을 써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면서도, 목선을 드러낸 재킷에 검정 매니큐어로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보여줬다. 29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테즈(민주당·뉴욕)도 활동적이면서 여성스러운 흰 셔츠에 베이지색 치마를 입고 트레이드마크인 긴 생머리와 빨간 립스틱 차림으로 개표 행사에 참가했다.

NYT는 신진 여성 정치인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패션이 남성 위주 문화에서의 해방을 뜻함은 물론 '여성 내부의 세대교체자 독립 선언'으로도 해석된다고 했다. 낸시 펠로시(78)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나 키어스틴 질리브랜드(51) 민주당 상원의원 등 기성 정치인들은 아직 전통적인 파워 슈트를 고집하지만, 젊은 피가 의회의 풍경을 바꾸고 정치 문화도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