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그 남자는 자신만 사랑합니다… 아내는 엄마, 애인은 장난감일뿐

조선일보
입력 2018.11.10 03:00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소년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성숙이 안 되면 남자는 자기만 사랑합니다. 아내에게 엄마가 되어 달라 말합니다. 애인에게 장난감이 되어 달라 말합니다. 그런 남자, 주위에 있으신가요?

홍여사

그 남자는 자신만 사랑합니다… 아내는 엄마, 애인은 장난감일뿐
일러스트= 안병현
"나, 그 사람 만났어. 한 번 봤으면 하고 연락이 와서…"

같이 밥 먹다 한동안 대화가 끊겼을 때 남편은 문득 그렇게 말했습니다. 툭 던져놓고, 내 반응을 기다리는 침묵. 무슨 소린가,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젓가락을 다시 움직이며 나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디서?"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남편은 멈칫하더니, 곧 어느 동네 무슨 카페에서라고 정직하게 대답하더군요. 웃을 일이 아닌데 저는 실소가 터지는 걸 참아야 했습니다. 십수년 전 정리한 '여자'를 다시 만나보았다고 아내에게 보고하는 남편에, 거기다 대고 고작 묻는다는 말이 '어디서?'인 아내. 하지만 달리 무어라 물을까요? 이제 와 새삼 무엇 하러 만났나? 그래, 만나보니 어떻던가? 그녀는 여전히 젊고 발랄하던가? 그렇게 물어볼 수는 없지 않나요?

남편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정직함은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속이고 또 속이다가 들키면 모든 걸 시시콜콜 자백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지갑에서 동전을 훔쳐 오락실에 갔다가 들킨 남편은 아버지의 호통 소리 한 번에 자진하여 그간의 모든 비행을 소상히 적어서 제출했다더군요. 2004년 가을 심야에 걸려온 그 여자의 전화 한 통으로 남편의 오랜 거짓이 들통났을 때에도 남편은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겁에 질린 얼굴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여자는 언제 어떻게 만난 누구이며, 몇 살에 뭐 하는 여자인지. 언제부터 내게 거짓말을 하며 몰래 만나 왔는지. 이뿐만 아닙니다. 내가 굳이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모조리 다 털어놓더군요. 자신을 사로잡은 그 여자의 특이한 매력이란 어떤 것이었으며, 만나서 주로 무얼 했는지, 다시 젊어지는 그 기분이 얼마나 짜릿했는지…. 그 모든 잔인한 고백과 맞바꾸어 한 가지만은 믿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와의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며 나에 대한 애정과는 아무 상관없는 '감정의 유희'였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애초에 선을 그어두고 있었고, 자신은 그 선을 끝까지 넘지 않았다고요.

선이라니…. 코웃음이 나더군요. 피가 뜨거운 사람의 감정에 선을 그어놓고 안심하다니 스스로도 믿지 않는 얄팍한 알리바이일 뿐이지요. 나에 대한 애정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도 한낱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자기를 둘로 쪼갰던 것뿐.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순진한 실수로 포장하려는 남편에게 저는 도저히 속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저는 끝내 남편과 헤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겪어 보니 이혼은 결심이 아니라 행동이더군요. 이대로 같이 살아갈 수 없겠다는 판단만으로는 헤어지지 못합니다. 확실한 명분을 쥐고, 충동적으로 좌충우돌 움직여야 이혼이 되는 거더군요. 그러나 그 당시 저는 충격으로 현실적인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남편은 참으로 용의주도하게 움직였죠. 현실을 택한 남편은 그 여자와의 관계를 보란 듯이 끊어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일상과 사적인 영역을 저에게 전부 오픈했습니다. 그나마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남편인 게 다행스러운 일일까요? 그런데 저는 왜 마음이 풀어지지를 않았을까요? 철저한 반성 모드의 남편은 의심하고 경멸하는 아내보다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혹의 순간에 선을 넘지 않은 것은 책임감 있는 가장이라는 증거이고, 반성하고 돌아와 모든 걸 오픈한 것은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의 증거이며 우리는 이제 더욱 굳건한 관계로 거듭날 거라는 남편의 주장이 나를 짓눌렀습니다.

남편의 헛소리를 믿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궤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점은 제게 있어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대견한 부분입니다. 소중한 현실을 지키기 위해 역겨운 진실을 모른 척하는 그 일을 나는 해내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십오년간 나는 남편과 싸워온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싸워왔습니다. 나는 혼자임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품위 있게 현실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노와 의심은 약해졌지만, 한번 닫혀버린 마음은 다시 열리지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 남편은 십오년 만에 그때 그 여자 얘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왔다 말합니다. 내가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내게 그런 얘기를 꺼내느냐는 점입니다.

"굳이 만나서 뭐하랴 싶다가 한편으로는 피할 이유는 또 뭔가 싶더군. 그래서 만나보니…."

남편은 이번에도 정직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잠자코 숟가락질만 하는 중인 내게 굳이 다 말해주려는 걸 보니 말입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해졌어. 아무 앙금도 감정도 없더라고. 밝게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스러울 뿐…. 서로 좋게 헤어졌어."

남편의 두 눈은 따뜻한 햇살에 젖은 나뭇잎들처럼 가늘어져 있습니다. 마치 장한 일을 하고 엄마의 칭찬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남편은 내 반응을 기다립니다. 그는 내게 대체 무얼 기대하는 걸까요? 자기의 감회 어린 추억에 나도 같이 미소 지어 주길 바라는 걸까요? 그 놀라운 정직함에 또 한 번 감사하길 바라는 걸까요?

나는 다 먹은 밥공기와 숟가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다시 만난 김에 예전에 하던 그 감정놀음이나 재개해보지 그랬어. 돈만 축내지 않으면 진심으로 아이 돈 케어!"

설거지통에 밥그릇과 수저를 넣고 물을 쏴 틀었습니다.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더군요. 등 뒤의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든 아이 돈 케어! 남편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든 아이 돈 케어! 십오 년 만에 겨우 찾은 마음의 평화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아이 돈 케어! 상관 안 해. 상관없어!

우리 결혼 생활의 슬픈 결말을 그 외의 무슨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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