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CD 100장은 사야 '팬사인회 커트라인'… 실물 음반 판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입력 2018.11.10 03:00 | 수정 2018.11.10 09:00

아이돌 팬사인회

정당한 마케팅 vs 사행성 조장

한국 음악 시장에서 역주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음악 시장이 다운로드와 스트리밍(디지털 재생) 중심으로 재편됐음에도 유독 한국에서만 실물 음반(CD) 판매량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가온차트에 따르면 상위 400개 음반의 연간 판매량은 2011년 682만장에서 2017년 1693만장으로 2.5배 가까이 늘었다. 2014년에 잠시 주춤했을 뿐 집계를 시작한 2011년 이래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최근엔 폭증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2016년 1080만장에서 2017년 1693만장으로 57% 늘어난 데 이어 올해 역시 3분기까지 1634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191만장보다 36% 늘었다. 세계 음반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임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활황이다. K팝의 인기와 위세가 나날이 커짐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정도 수치는 팬 한 명 한 명이 많은 음반을 구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앨범을 여러 디자인으로 발매하거나 포토카드 등 기념품을 무작위로 동봉해 다량 구매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이돌 팬 사인회를 둘러싼 잡음은 사행성 논란마저 일으키고 있다. 앨범을 구입할 때마다 팬 사인회 응모권을 주는데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한 명이 수십 장, 때로는 수백 장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팬 사인회가 앨범 판매 촉진을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현재 아이돌 팬덤에선 '커트라인'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인다. 팬 사인회에 당첨되려면 이 정도는 구입해야 한다는 뜻으로 아이돌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로 통한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방탄소년단, 워너원, 엑소 등 '보이 그룹 3대장'은 100장을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3월에는 426만원을 들여 213장을 구입한 이가 워너원 팬 사인회에 탈락했다고 인증한 글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팬 사인회는 음반을 매개로 행해지는 간접적인 경매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누군가는 비효율을 만들어내고 사행성을 조장하는 시장경제의 빈틈으로 여기는 반면 누군가는 정당한 마케팅 수단이자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변곡점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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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안병현
부작용 있지만 규제 어려워

시장경제의 빈틈으로 여기는 시선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한 음반을 잔뜩 구입하는 행태는 비효율적 측면이 다분하다. 같은 앨범 수십장을 산 팬들 대부분은 응모권과 기념품만 가진 뒤 나머진 폐기하거나 헐값 또는 무료 양도 수순을 밟는다. 좋아하는 가수를 직접 만날 수 있는 팬 사인회의 효용은 팬심(心)에 따라 수백만원을 넘나들 수 있겠으나 CD까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팬 사인회에 당첨됐다면 원하는 걸 얻었으니 괜찮다. 그러나 수십 장 넘게 구입하고도 탈락한 사람의 심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경매에 입찰해서 원하는 물건을 따내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제시한 금액을 고스란히 바친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팬 사인회의 경매 방식이 지닌 문제점으로 지적할 만한데 일본 사례와 비교하면 이 문제가 더욱 명료해진다.

한국에 팬 사인회가 있다면 일본엔 '악수회'가 있다. 아이돌 멤버와 팬들이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하는 행사다. 한데 여기서 일본은 '선 응모→후 구입' 방식을 취한다. 당첨되면 그만큼 앨범을 구입하고 탈락하면 주문을 자동으로 취소해준다. 자연히 213장을 구입하고 탈락하는 사례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 같은 사인회 응모 방식은 도박에 가깝다는 이유로 일본 법령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아이돌 또한 현지에서는 한국 방식으로 진행하지 못한다.

아울러 이와 같은 음반 판매량 뻥튀기가 음악 차트를 왜곡한다는 점도 고민해볼 대목이다. 소비자에게 음악 차트는 정보 수집 창구이자 가이드의 의미를 갖는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다. 음반·음원 판매 순위가 모두 팬 사인회, 사재기, 줄 세우기 등으로 왜곡되어 올바른 척도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차트가 아이돌 팬덤이 자존심 경쟁을 벌이는 장으로 활용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규제로 대응하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대중문화산업과 관계자는 "(아이돌 팬들의 앨범 사재기는) 민원도 많이 들어오는 문제로 과열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위축시킬 위험이 있기에 (각 아이돌그룹 소속사의) 마케팅 수단을 직접 규제하고 관리하는 건 정부로서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 역시 "(아이돌 팬 사인회 응모는) 일종의 기업과 소비자 간 간접 경매인데, 그에 적용할 딱 들어맞는 법은 없다. 또한 민간의 수요·공급에 따른 거래임을 감안할 때 위법 가능성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며 "경매는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업의 영업 모델로서 경쟁을 제한하거나 뚜렷한 불공정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면 규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내수시장 작아서 해외로 나간 K팝

시선을 달리해서 보면 팬 사인회라는 서비스를 매개로 더 많은 음반을 판매하려는 공급자(아이돌 가수)에게도, 좋아하는 가수를 만나고픈 마음에 돈을 쏟아붓는 수요자(팬)에게도 뚜렷한 잘못은 없다. 마약이나 성매매처럼 사회가 문제시하는 대상이 아닌 이상 비판의 날을 들이대기도 모호하다. 도리어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섣부른 규제가 엔터테인먼트 산업 성장 동력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화투자증권 지인해 연구위원은 "음악 부문은 매출총이익률(매출에서 원가를 차감하면 남는 비율)이 50%대에 이르는 수익성 높은 분야여서 여기에 규제가 가해지면 타격이 크다"고 진단한 후 "과열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규제가 아니라 한국 콘텐츠 시장의 선진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류'가 탄생한 이유를 거꾸로 추정해보면 내수에만 집중해선 아티스트 개발에 투입한 비용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시각을 제시했다.

지 연구위원은 "음원의 경우 선진 시장에서는 플랫폼(멜론 등 음원 서비스 회사)과 권리자(가수·작곡가 등)의 수익 배분율이 3대7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이전까지 7대3이었다"며 "이후 개선 노력에 힘입어 4대6까지 왔고 내년엔 35대65가 된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권리자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적용돼야 긍정적인 선순환 구조가 구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에 비해 가수가 음원을 팔아서 이익을 내기 힘든 환경을 꼬집은 것이다.

콘서트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콘서트가 해외에 집중된 것 역시 한국에선 이익을 내기 어려워서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는 전문 공연장이 부족하고 경제 규모에 비해 공연 시장도 크지 않아 전국 투어나 장기 공연을 개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기 있는 아이돌조차 서울에서만 간헐적으로 콘서트를 치르고 해외에 집중하는 이유다. 아이돌 콘서트 표가 순식간에 매진되고 비싼 암표가 나도는 것만 보면 굉장히 큰 시장 같지만 이는 국내 콘서트 횟수가 적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다.

이는 인구가 많고 내수 시장이 큰 일본의 환경과 대조적이다. 전국 곳곳에 좋은 공연장이 있고 공연을 즐겨 찾는 문화 역시 정착돼 있어서 인기 아티스트는 모든 주요 도시에서 수만 명의 관객을 거뜬히 동원한다. 동방신기 또한 최근에 일본에서 단일 가수 투어로 100만명을 동원하며 해외 가수 중 관객 동원 기록을 수립했다. 20회 공연이었으니 회당 평균 5만명이 관람했다. 이토록 넓은 인프라와 문화 저변 덕분에 티켓도 저렴하다. 일본은 전국 어디서나 전문 공연장에서 좋은 공연을 비싸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예외적인 국가다.

시장 선진화해 질적 성장 도모해야

우리 사회가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다. 해외에서 거두는 성과를 '한류'로 지칭해 뿌듯하게 여기면서도 젊은 세대의 향락, 과소비 등으로 간주해 내심 낮춰 본다. 팬 사인회는 그런 심리를 부추겨 사행성 논란까지 일으키는 문제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음원, 콘서트 등으로 수익을 내기 힘든 환경이 가수들로 하여금 음반 판매량을 늘리는 전략을 택하도록 유도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권리자의 몫을 늘리고 불법 다운로드를 근절하며 콘서트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시장을 선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지 연구위원은 매출총이익률 측면에서 음반(40%)보다 음원(70%)이 유리하기에 한국의 가수들도 결국 그쪽으로 나아가야 길게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보이 그룹 ‘방탄소년단’의 팬 사인회.
아울러 실물 음반 판매량이 역주행하는 현상을 과거 기준으로만 바라볼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기획사 관계자는 "음반은 단순히 음악을 듣기 위한 저장 매체를 넘어서서 그 앨범과 관련된 화보,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CD플레이어가 없는 사람조차 가수들의 비주얼을 즐기기 위해 음반을 구매하게 만든 것은 K팝 전략의 승리다.

다만 이를 감안해도 경매 방식의 팬 사인회가 품은 사행성의 일부는 교정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좋아서 수십~수백 장을 구입하는 건 공식적으로 문제시하기 어려우나, 그렇게 구매하고도 원하는 바를 못 얻은 이가 발생하는 상황은 개선해야 한다. 일본의 '선 응모→후 구입' 방식은 좋은 대안 중 하나다. 시장 자율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니 관련 부처가 법령을 정비해야 할 수도 있겠다. 이 정도는 건강한 규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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