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베일 벗은 용산 기지를 걷다

조선일보
  •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18.11.10 03:00

    [한은형의 애정 만세]

    [한은형의 애정 만세]
    지난 2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열린 첫 버스투어 모습.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1904년 이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던 용산 미군기지를 개방하고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용산 미군기지 버스투어’를 올해 말까지 여섯 차례 진행하기로 했다. 114년 역사의 ‘금기 구역’이 세상에 공개된 셈이다. 상상 속을 거닐던 ‘이방으로의 산책’은 끝나지 않았다. / 연합뉴스
    광화문에서 출발해 삼각지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원래는 서울역까지만 걸으려고 했었다. 그러다 옛 대우빌딩 외벽에 줄리언 오피의 '걷는 사람들' 연작이 상영된다는 걸 떠올렸다. K와 나는 줄리언 오피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가 어딘지 고심한 끝에 서울스퀘어로 바뀐 옛 대우빌딩과 서울역이 연결된 고가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날 줄리언 오피는 볼 수 없었다. 인터넷 기사와 블로그 같은 것들을 뒤져서 상영 시간까지 확인했는데도 그랬다. 허탈해진 우리는 고가와 연결된 맥줏집으로 들어갈까 하다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숙대입구역을 통과했고, 삼각지역을 통과했다. 인상적인 양꼬치집과 '연어 무한리필' 식당과 경양식집을 발견했고, 한진중공업과 해태제과와 용산 미군기지를 지났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용산 미군기지의 담장을 옆에 두고 걷던 밤이었다.

    내가 걸은 루트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지도를 보다 놀라운 걸 발견했다. 미군기지는 그저, 녹색이다. 녹색으로 비어져 있다. '입구'니 '출구'니 하는 단어는 물론 '용산 미군기지'를 연상시킬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 역시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국 지도에 없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는 한국 땅에 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주소를 갖고 있는 곳이므로. 그런데 '왜 하필이면 캘리포니아일까' 늘 궁금했었다. 왜 미국에 있는 50개의 주 중에서 노스다코타도 아니고 미주리도 아니고 네브래스카도 아닌 캘리포니아일까? 미국 지도를 보다가 '혹시… 이래서?'라는 생각이 스쳤다. 캘리포니아주가 한국과 가장 가깝다! (진짜 이 이유 때문일까?)

    용산 미군기지를 버스로 투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미군기지가 완전하게 비워지기 이전의 모습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114년 만이라고 했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주둔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다. 1953년 동숭동에 있던 미8군사령부가 옮겨왔고, 1959년에는 도쿄의 유엔군사령부가 이전했다.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렇게 그곳은 '용산 미군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지속되는 일반인 출입 금지. 금지와 금기는 호기심을 깨우는 법, 나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곳의 호텔과 마트와 클럽과 스테이크 하우스에 대해 들었지만 내 눈으로 담 안을 보고 싶었다.

    "담의 저쪽은 미군 부대 소속원들의 근무와 주거와 문화생활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완벽한 자족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담장 안에는 일제 초기에 세워진 일본군사령부 건물 등 근대 초기의 유서 깊은 건물들과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 터들도 산재해 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고 풍부한 녹지들이 확보된 평화로운 전원도시의 공간, 미국 본토에서나 만날 수 있는 담장 없는 단독주택들이 만드는 산뜻하고 쾌적한 공간, 담 바깥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과 남루함과는 전혀 다른 미국 소도시의 평온한 경관과 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 장소가 안쪽에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의 일부다. 용산에 사는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용산을 걷고 또 걸으면서 쓴 책이다. 어법에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산책 인문지리서'라고 하면 적당하려나?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하고 있는 '걸어본다'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이기도 하다. 출판사는 시리즈를 이렇게 소개한다. "여행이 아닌, 관광이 아닌, 바야흐로 산책.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거닐 줄 아는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뒤따르는 과정 속에서 저마다의 '나'를 찾아보자는 의도로 이 시리즈는 시작됐다. 좁게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넓게는 내가 사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산책의 기쁨이 목적 없는 걷기라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즐거움을 느낄 만한 시리즈물이라 하겠다.(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강병융의 류블라나, 배수아의 알타이, 김유진의 아이오와, 백가흠의 그리스 등이 있다.) '이광호의 용산'은 세 코스의 산책길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지 사거리에서 시작해 효창공원, 청파동을 거쳐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서부이촌동에서 끝나는 코스. 삼각지 화랑거리, 전쟁기념관, 녹사평역, 해방촌, 이태원을 지나 남산에 도달하는 코스. 한남동과 동부이촌동과 국립중앙박물관과 남일당 터가 병렬되는 코스.

    광화문에서 삼각지까지 걸은 날도 이 책을 펼쳤다. "동쪽에서 뻗어온 길은 삼각지 고가를 타고 넘어가고, 고가는 용산역과 서울역 사이의 오래된 철길을 가로질러 서 있다. 삼각지의 모퉁이들은 각기 다른 시간을 담고 있다. 네거리의 동쪽 방향으로는 오래된 식당들과 술집들이 있고 그 옆에는 이 나라의 국방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좁은 대구탕 골목은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과 무채색의 옷을 껴입은 중년 남자들로 붐볐지만, 국방부의 높은 담 위로 솟아난 벚나무들은 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꽃잎들을 길 위로 날려보낸다.

    삼각지 고가 입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개발 붐을 등에 업은 거대 기업의 최신 주상복합 건물이 솟아올라 있고, 건너편은 낡은 가게와 골목들과 재개발을 앞둔 것 같은 쇠락한 공간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그 골목들은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담과 그 담 가운데 뒷문처럼 자리 잡은 초라한 출입구와 그 옆에 놓인 버려진 화분들을 품고 있었다. 한때 푸른 식물이 뿌리를 내렸으나 이제는 푸석한 흙만을 채우고 있는 빈 화분들만큼 이 골목들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압축하는 것은 없다."

    [한은형의 애정 만세]

    한 자 한 자 짚으며 읽는다. 산책을 복기한 것이다. 또한 한때 나도 용산에, 삼각지에 매혹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 집을 보러 다녔다.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좋았다. 오래된 식당과 술집이 좋았고, 전쟁기념관에 들어가 탱크와 비행기 옆을 걸을 수 있는 게 좋았고, 고가와 철길이 불러내는 기묘한 심상이 좋았다. "어느 곳에서도 멀지 않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방의 느낌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곳. (…) 지칠 듯한 리듬과 절단된 세계의 풍경. 창백한 햇빛 아래 수십년 전의 먼지들이 건물들 사이로 흩날리는 거리." 이렇게 이 산문의 행간을 거닐듯 나는 또 그 거리를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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