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한국 반도체, 세 번째의 天運

조선일보
  • 박정훈 논설실장
    입력 2018.11.09 03:17

    이병철은 무얼 믿고 독일·영국도 못 해낸 반도체를 먹겠다고 덤벼들 생각을 했을까
    한국 반도체는 출발부터 기적이었다

    박정훈 논설실장
    박정훈 논설실장

    이 정부가 경제 실적을 홍보할 때 내세우는 몇 안 되는 지표가 수출이다. 지난주 국회 연설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수출을 언급했다. "우리가 이룬 경제 발전의 성과가 놀랍다"며 수출 호조를 근거로 들었다. 올해 수출은 작년보다 6% 이상 늘어났다. 그런데 이게 다 반도체 덕분이다. 삼성전자 한 기업의 반도체 수출 물량만 빼도 총수출은 마이너스로 뒤집힌다. 삼성을 미워한다고 소문난 정부가 삼성의 반도체에 목매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리막 걷던 설비투자가 9월 3% 증가로 반등했다. 정부는 반색했지만 역시 반도체 효과였다. SK하이닉스 등의 투자를 제외하면 9% 감소로 바뀐다. 3분기 상장 기업 영업이익은 18%나 늘어났다. 대단한 호황 같지만 그중 삼성과 SK하이닉스 비중이 61%에 달한다. 수출도, 투자도, 기업 실적도 반도체 빼면 껍데기만 남는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도대체 나라 경제가 어쩔 뻔했나 싶다.

    한국 반도체가 장악한 글로벌 패권은 견고하다. 반도체 수퍼 호황이 끝나간다지만 쉽게 1등 자리를 내주진 않을 것이다. 다만 중국 변수가 무섭다. 중국이 겁나는 것은 '반칙'을 서슴지 않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반도체는 민간 산업이 아니다. 정부가 총대 메고 돈과 인재와 자원을 쏟아붓는 국가 산업이다. 기술 탈취도 정부가 지휘한다. 인민해방군까지 산업 스파이를 내보내 기술을 빼오고 있다. 거대 중국이 총력전을 펴는데 반도체 굴기(�起)는 시간문제라고 봐야 한다. 결국은 우리를 따라잡을 것이다.

    이 중대한 변곡점에서 뜻하지 않은 소식이 나왔다. 미국이 중국 업체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을 막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생산은 한국이 1등이지만 제조 장비는 미국이 독점하고 있다. 미국산 장비가 없으면 중국은 생산 라인을 구성할 수 없다. 미국이 작심하고 중국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포기하진 않는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반도체 굴기를 이루려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길을 가야 하고 기술적 난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로선 시간을 번 셈이다. 천운(天運)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30여 년 전에도 행운이 있었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컴퓨터 칩을 안 주면 미국이 곤란해진다"며 기어오르자 미국은 좌시하지 않았다. 일본 팔을 비틀어 일본 반도체에 10년간 족쇄 채우는 협정을 맺었다. 일본세 퇴조와 비례해 한국 반도체에 훈풍이 불어왔다. 일본 반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시장이 삼성전자로 넘어왔다. 1993년 삼성은 일본을 제치고 D램 1등에 올라섰다. 반도체 진출 후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미·일 분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반도체 신화는 없었을지 모른다.

    반도체는 단순한 상업 제품이 아니다. 안보 체계와 군사 패권까지 좌우하는 군·산(軍産) 복합의 전략 산업이다. 반도체 칩이 없으면 현대전의 고(高)정밀 무기 시스템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의 연산과 데이터 처리 능력도 반도체가 명줄을 쥐고 있다. 강대국 패권 경쟁이 거세질수록, 4차 산업혁명이 빨라질수록 반도체 가치는 높아진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산업을 우리 것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미국에게 반도체는 고도의 전략 이슈다. 반도체의 칼자루를 경쟁국에 넘기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중국·일본을 밟은 것도 그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은 대국(大國)이 아니다. 미국과 안보 이익을 공유하는 동맹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국 반도체가 전략적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한국이 D램 시장의 70%를 장악해도 용인한다. 거꾸로 말하면 동맹이 균열하면 반도체도 무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한국이 미국식 안보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동맹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그 지정학적 운명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한국 반도체엔 고비마다 운이 따랐다. 출발부터가 기적과도 같았다. 1980년대 초, 그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이병철은 반도체 진출의 결단을 내렸을까. 독일·영국·프랑스도 못해낸 반도체를 먹겠다고 감히 덤벼들 생각을 했을까. 지금 보아도 불가사의하다. 이병철이라는 걸출한 기업인이 있었던 것이 우리에겐 천운이다. 나라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천운이 찾아왔다. 미국의 견제로 반도체를 비롯한 중국의 첨단 산업 굴기는 주춤할 것이다. 중국의 추격에 쫓기는 우리로선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다. 경쟁력 격차를 벌리고 미래 먹거리를 찾아낼 마지막 골든타임일지 모른다.

    아무리 운이 찾아와도 그것을 기회로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 몫이다. 이 엄중한 시점에 대한민국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어느 누가 중국을 따돌릴 국가 전략을 고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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