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492] 순안첩공 (瞬眼輒空)

조선일보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8.11.08 03:15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번잡한 일상에서 조촐한 삶을 꿈꾼다. 도륭(屠隆)의 '청언(淸言)' 몇 칙을 골라 읽는다.

    "늙어가며 온갖 인연이 모두 부질없음을 자각하게 되니, 인간의 옳고 그름을 어이 상관하겠는가? 봄이 오매 그래도 한 가지 일에 마음이 끌리니 다만 꽃이 피고 시드는 것이라네(老去自覺萬緣都盡, 那管人是人非. 春來尙有一事關心, 只在花開花謝)."

    부지런히 인맥을 관리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살았어도 문득 돌아보면 덧없다. 제 한 몸 옳게 간수하기도 버겁다. 내가 옳다 해도 옳은 것이 아니요, 내가 그르다 해도 남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세상일에 옳다 그르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봄이 오면 자꾸 화단의 꽃 소식에 마음이 이끌린다. 오늘 막 핀 꽃이 밤사이 비바람에 꺾여 땅에 떨어지지나 않았을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세상을 향한 관심을 조금씩 거두면서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자꾸 눈길이 간다.

    "달고 쓴 맛을 다 맛보고 나서 그저 손을 놓자, 세상맛은 밀랍을 씹는 것과 한가지고, 살고 죽는 일이 중요해도 급히 고개를 돌리니, 세월은 총알보다 빠르다(甛苦備嘗好 手, 世味渾如嚼蠟. 生死事大急回頭, 年光疾于跳丸)." 단맛 쓴맛 다 보고 나니 아무 맛도 없다. 한때는 죽고 살 것처럼 매달렸던 일도 지나고 나니 허망하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던 그 마음이 머쓱하다.

    "밝은 노을이 어여뻐도 잠깐 사이에 문득 사라진다. 흐르는 물소리가 듣기 좋아도 스쳐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사람이 밝은 노을빛으로 어여쁜 여인을 볼진대 업장(業障)이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사람이 능히 흐르는 물소리로 음악과 노랫소리를 듣는다면 성령(性靈)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明霞可愛, 瞬眼而輒空. 流水堪聽, 過耳而不戀. 人能以明霞視美色, 則業障自輕. 人能以流水聽絃歌, 則性靈何害)?"

    오래 못 갈 것을 영원할 줄 알았다. 지금 좋으니 나중에도 좋을 줄로 여겼다. 저녁 노을은 잠깐 만에 어둠으로 변하고, 마음을 차분히 씻어주던 물소리도 자리를 일어서자 사라져 버렸다. 아름다운 사랑도 노을처럼 보고, 듣기 좋은 노래도 물소리같이 들으리라. 마음만 투명하게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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