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날씨처럼 종잡을 수 없는, 당신의 그 마음이 옳다" 정혜신

입력 2018.11.10 08:00 | 수정 2018.11.11 18:05

"성공한 부모 둔 자녀 ‘자기 소멸' 위험 높아"… ‘금수저'들 알고보면 ‘투명수저'
"마음의 감기도 암도, 다 우울증... 변별력 없는 우울증 진단, 없어져야"
"네 마음이 어떠니?" 존재에 주목하는 질문이 곧 심폐소생술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1만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다./사진=김지호 기자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1만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다./사진=김지호 기자
강자든 약자든,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노인이든 청소년이든, 저마다 관계의 고통으로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공감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관계를 단절하고 ‘존재를 꺼버린' 정신적 사망자는 날로 늘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엽기적 갑질’은 사회면 뉴스를 도배하고,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신과에서 발부받은 ‘우울증 진단서’를 면죄부로 들이민다.

바야흐로 모두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집단 히스테리의 날들이다. ‘거리의 치유자' 정혜신을 만났다. 정신과의사로서가 아닌 이 사회의 응급의학과 전사로서다.

그는 오랫동안 심리적 트라우마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격증을 가진 전문의로서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상담하고 약물을 처방하는 일괄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의 ‘곪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다고. 정혜신은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개별 욕구'에 집중하면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 걸 알았다.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사람의 마음을 만져 정체성을 회생시키는 이 기법을 그는 ‘심리적 심폐소생술'이라고 이름 지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불안해하거나 침묵하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지금, 네 마음이 어떠니?"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 단 이 마음의 처치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룰이 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금할 것. "네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망치 같은 각성의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녀의 남편이자 심리기획자인 이명수는 정혜신과 1년에서 이틀을 뺀 363일 24시간 함께하면서 이 ‘심폐소생술'의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이명수는 고통의 당사자들이 얼굴빛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공감의 ‘신기술’의 증언자가 됐다. 부부가 나란히 ‘지은이'와 ‘영감자'에 이름을 올린 책 ‘당신이 옳다'가 지금 서점가에서 치유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가까이서 만나 본 정혜신은 공감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연민과 집중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이 우주에서 지금 당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발사했다. 그는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사회적 성공 또한 대체로 세련된 자기 억압의 결과며, 성공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공통으로 ‘자기 소멸'의 위기를 겪는다고 했다. 알고 보면 ‘금수저'들 또한 정체성의 ‘투명 수저'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

-눈동자가 매우 특이하십니다. 과연 ‘다정한 전사'의 눈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얼마 전엔 길에서 만난 한 30대 여성이 저를 알아보고 "선생님, 저 좀 안아주세요" 그래요. 꼭 한번 안아주고 헤어졌어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런 사람이 저를 많이 찾아와요."

-테레사 수녀도 아니고 힘든 사람을 어떻게 다 안아줍니까?

"다는 못 하죠. 형편껏 안아줘요(웃음)."

예상과는 달리 정혜신은 상처 입은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한 이유로 삶이 뻘밭에 빠진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왜 힘들지 않다는 걸까?

"고통에 빠진 사람과 함께 고여있으면 같이 빠져 허우적대죠. 그런데 서로 반응을 하잖아요. 내 눈빛, 반응이 가닿으면 상대가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게 느껴져요. 처참하게 쓰러져있다가 조금씩 숨이 돌고 점점 땅을 짚고 일어나는데... 그걸 보는 제가 어떻게 힘이 안 날 수 있겠어요?"

자기 존재를 민폐로 인식하는 청년들이 의외로 많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정혜신은 감정이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한다./사진=김지호 기자
자기 존재를 민폐로 인식하는 청년들이 의외로 많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정혜신은 감정이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한다./사진=김지호 기자
-상대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게 보통사람에겐 감정노동입니다만.

"젊고 미숙할 땐 저도 그랬어요. 수련 기간 동안엔 그 사람의 상처에 제 설움이 자극돼서 눈물이 터졌어요. 그럴 땐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도 모르죠. 이젠 안 그래요.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오히려 기운을 받아요."

-저를 포함해 ‘자기 소멸’을 겪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희미해진 나'라는 표현에 공감이 되더군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런 공기에 덮여있어요. 실패한 사람, 성공한 사람 다 마찬가지예요. 가만 보면 사회적 성공은 ‘자기 억압'의 결과예요. 성공한 사람은 다른 말로 나를 지우고 조직에 부응하는 촉을 발달시킨, 일종의 뛰어난 생존자지요."

-사회적 성공이 치러야 하는 혹독한 대가가 ‘자기 소멸'이다?

"그런 셈입니다. 제가 15년 동안 병원이 아닌 ‘상담 공간’에서 대기업 CEO, 정치인, 법조인 등 수많은 사회 지도층들의 속마음을 들었어요. 기업의 의뢰를 받아서요. 고도의 정신노동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관된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엔 리더십 등에 대해 고민을 이야기하다 점점 자기 모습, 부족함에 직면하죠. 그다음엔 부부갈등이고 결국 ‘자식과의 갈등'이라는 공통분모에 이르러요. 성공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공통으로 ‘자기 소멸'의 위기를 겪어요."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치유의 육성으로 가득한 책 ‘당신이 옳다'. 여기서 ‘옳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을 의미한다.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치유의 육성으로 가득한 책 ‘당신이 옳다'. 여기서 ‘옳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을 의미한다.
정혜신은 성공한 부모를 둔 자식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돈 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분노와 좌절을 느끼지만, 혜택받은 자들은 또 그 내부에 자기 고통이 있는 거죠. 부모가 가진 게 많아서 자기가 희미해져 버리는… 외형적으론 행복해 보여도 한 존재로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거예요."

-아이러니합니다. ‘금수저'를 만드느라 애썼는데 정작 자식은 ‘투명수저'로 느끼다니...

"장성한 아이가 부모와 맞서거나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성취한들 뭐합니까? 사회적 성공은 외형일 뿐, 존재 그 자체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 외형으로 상대를 흔들고, 상대는 그것에 압도당하니 서로가 안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거죠. 결국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 피해자예요.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해서죠."

-당신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간 아이, 고졸에 전자제품판매원을 하는 아이, 대졸에 무직인 아이… 세 자녀의 삶이 다양해서 놀랐습니다.

"큰아이는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 애는 살면서 책을 읽는 걸 못 봤어요. 영화나 만화책은 좋아했지요. 지금 전자제품 판매 일을 하는데,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사회적 상식과 균형 감각도 좋아요. 케임브리지대학에 합격한 막내는 지적인 욕구가 많고 공부를 좋아하죠. 그런데 그 막내는 어릴 때 자폐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사회성도 느리고 말도 느리고 친구도 없었어요.

영국의 섬머힐이 건강한 공동체라 거기에 보냈는데, 4~5년을 수업도 안 들어가고 그네 타고 나무 타고 놀더라고요. 오죽하면 열두 살에 한국에 와서도 패밀리 레스토랑 메뉴에 있는 ‘애플 주스'도 못 읽었어요. 기질적으로 부족한 아이라 거기 선생님이나 저희나 기대치를 낮추고 그냥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늦게 트이더라고요. 중3 때 처음 친구를 사귀고, 고1 때부터 세상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 어리바리하던 아이가 서서히 자기 일상을 건사하더니, 혼자서 집을 구하고 대학을 알아보고 진로를 찾더라고.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은 비정기적인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하며 구직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충고, 조언, 평가, 판단만 하지 않아도 공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사진=김지호 기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충고, 조언, 평가, 판단만 하지 않아도 공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사진=김지호 기자
-놀랍긴 하지만, 일반적인 사례는 아닌 듯해요. ‘자율성'을 우선한 대안학교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와 혼돈을 겪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니요. 충분히 그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은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기성 사회가 힘들고 부당하다고 느껴도 피난처가 있는 아이는 진짜 현실을 피하지 않아요. 어떤 모습이든 ‘네가 옳다'라고 충분히 인정받고 자라면, 세상을 견딜 에너지가 충분한 거예요. 저희는 막내를 진짜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린 보상을 받은 건가요?

"어쩌면 기다렸다기보다는 그 아이 자체로 자기 모습을 찾은 거예요. 저는 지금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어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아이들 때문에 에너지 소모를 겪지 않았어요. 스무 살 넘으면 특수한 관계의 남남이죠. 대학 다닐 때도 학비 외에는 자기들이 아르바이트해서 생활했어요. 덕분에 고졸 판매원 아이가 제일 부자예요(웃음)."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해준 말은 뭐죠?

"말해 주지 않았어요(웃음). 묻고 들어줬죠. 요즘 네 마음이 어떠니? 어떻게 지내니? 불편한 건 없니?"

정혜신은 대화 중에 ‘에너지가 남는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에너지가 남는다'는 말은 ‘지갑에 돈이 마르지 않는다'는 말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에너지가 남는 이유는 불필요한 소모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누고도 에너지가 남는다면 체력이, 정신력이 남다른 건가요?

"(웃으며)다들 자기 기가 빨리는 소모처가 있어요. CEO들은 자식과 전쟁을 치르며 투쟁하듯 살죠. 어떤 사람은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고요. 저는 그럴 일이 없었어요. 주식 투자로 돈 날리지 않아서 돈 굳었다고, 남편과 좋아라 하죠(웃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야 에너지 낭비가 없어요. 그 비결이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는 거예요."

-존재가 뭡니까?

"내 마음, 내 느낌,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감정입니다."

-재미철학자 전헌 선생도 ‘자기감정을 아는 것이 철학의 전부다'라고 했습니다.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는 48가지 감정을, 동양철학자 퇴계는 ‘희노애락애오욕’ 7가지 감정을 핵심으로 인류를 설명했지요. 하지만 철학이 아닌 정신의학을 전공한 당신이 ‘네 존재가 곧 감정이다.’고 하는 말은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근원적 코드는 존재에 대한 주목입니다. 존재는 감정이고 ‘감정이 옳다’는 건 생각이나 행동이 옳다는 말과는 또 달라요. 풀이하면 ‘네가 그럴 땐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즉 ‘네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입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사람은 부모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연민도 있어요. 적개심과 무력감이 동시에 오지요. 상호모순적이에요.

날씨처럼 예보도 힘들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마음입니다. 그렇게 변화무쌍한한 게 사람 마음이고, 그 모든 게 그 사람의 삶입니다. 그 존재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관계의 평화가 오지요. 그저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이렇구나' 추궁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존재가 살아납니다."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병명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의료전문인인 당신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2003년쯤부터 진료실을 벗어나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환자가 아닌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난 건 저에게 도전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의사가 진료실을 나왔습니까?

"IMF 때 대규모 실업에 관한 보고서를 쓴 게 계기가 됐어요. 당시에 저는 실직자가 아니라 직장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초점을 맞췄어요. 전쟁터에서도 곁의 동료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심각한 죄의식과 불안에 시달려요.

남은 자들은 생존에 더 치열해집니다. 새벽부터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자기 안전에 절대적인 에너지를 쏟는 거죠. 마구 달린 다음엔 냉소가 찾아와요. 그 보고서를 발표한 후에 기업의 의뢰를 받았어요. 남은 사람들의 심리를 살펴봐달라는 거죠. 그때부터 진료실의 환자가 아닌 보통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마음 관리 회사의 운영자였던 셈. 그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나 낮과 밤이 극과 극으로 달랐다. 낮에 만난 사람이 재벌 회장, 대통령 후보자, 판사 등의 사회적 강자였다면 밤에 만난 사람은 해고노동자나 국가 폭력 피해자 등의 약자였다.

-낮과 밤의 격차가 그렇게 크면 스스로도 꽤 혼란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저에겐 모두가 각각 하나의 존재로 다가왔어요. 높은 사람도 결국 자식과의 갈등으로 허우적거렸고, 얘기하다 보면 존재의 본질은 다르지 않더군요."

-최근엔 정신과 상담 경험을 글로 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인기더군요. 전문가들의 책보다 일반인의 가벼운 에세이가 더 환호받는 이유가 뭘까요?

"환자들은 대기실에 앉아서 듣는 정보를 가장 신뢰합니다(웃음). 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큰 영향을 받지요. 설사 같이 허우적거리게 되더라도 분명한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의사와 환자는 반치유적인 구도예요. 저는 전문가가 치유하는 게 아니라 치유하면 전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듣기엔 불편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요즘의 정신의학계는 문제가 많습니다. 정신 산업과 연계돼 문턱이 낮아졌고 과잉 진단도 잦아요. 분노조절장애도 그래요. 자주 거론되니 아예 병명을 붙여줬죠. 우울증도 미국표준진단체계인 DSM-5에 따라 체크리스트 몇 개에 해당하면 쉽게 진단을 내려요. 잠 못 자고 입맛이 없고 좀 불안하다고 하면 우울증이라는 거죠."

진단 해악이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현실에선 우울증 병력의 범죄자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요.

"진단이 휴지통이 돼버린 거죠. 몇 해 전 독일 항공사 부기장 루비츠가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바람에 150명이 죽었어요. 그 원인을 우울증으로 내렸죠.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150명을 죽인 사람이나 끔찍한 흉악범이나 소심한 불면증 환자나 다 우울증입니까? 말이 안 돼요. 마음의 감기도 마음의 암도 다 우울증이라면 그건 정말 게으르고 변별력이 없는 진단이지요."

-그럼 우울증 진단은 어떻게 내려져야 합니까?

"저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없어지길 바래요.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 위에 개별적인 존재고 감정은 날씨처럼 움직이죠. 존재의 개별성에 주목하지 않으니 소외가 생기는데, 의사들은 핵심을 외면하고 세라토닉 약만 처방해줘요. 그래서 의사에게 화가 난 사람들이 자기가 책을 쓰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요. 저 자신이 포함된 한국 정신의학의 현주소예요."

-프로이트가 오면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할까요?

"글쎄요. 난감해하겠지요. 뭐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의 좌절을 들어줄 참입니다. 듣기 시작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돼요."

-하지만 또 그 듣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듣다가 못 참고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욕구가 발동해서 그렇습니다. ‘충조평판'만 안 해도 성공입니다. 끊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면, 상대가 다 알아서 다 정리를 해요. 말하는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거든요."

그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범죄자들의 잔혹 행위도 ‘자기 소멸'의 이치로 설명했다.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폭력이다. 상대의 극단적 두려움 속에서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범죄자들의 잔혹 행위도 ‘자기 소멸'의 이치로 설명했다.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폭력이다. 상대의 극단적 두려움 속에서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튼튼한 관계에는 존중과 경계가 함께한다고 했는데, 경계란 무엇인가요?

"국경처럼 너와 나 사이의 선이죠. 너와 나는 다르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인정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상대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약속. 경계가 지켜져야 존중할 수 있어요. 저와 남편도 듣고 말하는 데는 한 몸처럼 반응하지만, 경계에는 서로 예민해요."

-당신을 보면 인생에서 배우자가 주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의 영감자와 후원자가 되어주는 부부관계의 비결이 뭔가요?

"(웃으며)저는 남편이 미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섭섭한 적도 없어요. 얘기하면 이해하고 해결이 되지요.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지 아니까. 우리는 서로를 엄마, 아빠라는 역할로 규정하지 않아요. 너와 나, 존재로 보지요. 호기심을 갖고서요. 순간순간 힘들어도 대화를 하면 충전이 돼요. 늘 에너지가 남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정하고 구체적인 화법은 평범한 남자들에겐 익숙지 않습니다.

"제 조언을 듣고 아내가 남편한테 "요즘 당신 마음이 어때요?" 물었더니 "무슨 소리냐"며 딴청을 피우더래요(웃음). 당장 호응이 없어도 그런 질문은 존재에 가닿아 파장을 일으켜요. 반드시 우연한 순간에라도 화답을 받을 거예요."

-정신과 의사가 꿈이었습니까?

"엄마가 오래 앓다 돌아가셨어요. 어릴 때부터 왕진 가방 들고 다니는 의사를 보면서 유치한 마음에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의대에 진학하고 보니 모든 게 나랑 맞지 않더군요. 정신과를 발견했을 땐 암흑 속에 빛을 본 기분이었죠."

-부모와의 관계는 건강했나요?

"엄마는 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우울하셨어요. 자상할 여력이 없던 그분에게 저는 연민이 많아요. (지금 남편인)명수 씨를 만나기 전까지 저도 간신히 버티고 살았어요(웃음). 열일곱이 되어서야 말귀 알아듣고 친구 사귄 우리 집 막내처럼, 저도 오래 걸리는 사람인가 봅니다(웃음)."

-내 마음을 궁금해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치유된다고 했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주변에 없더라도 그런 존재를 떠올리고 인식하는 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나요. 자각하는 게 중요하죠. 만약 없다면, 내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세요. 보통은 내가 가장 먼저 자신에게 가혹한 타자가 되기 쉬워요. 스스로 "왜 슬프지?" "그랬구나" 묻고 들어주세요. 또 하나의 방법은 내가 타자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겁니다. 내가 타인의 마음을 궁금해하면 빠르게 보상이 옵니다."

‘나만 있고 너는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라고 정의하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나만 있고 너는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라고 정의하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마지막으로 묻지요. ‘옳다'는 자기 적절감, 수용 받음에 대한 증거지요. ‘괜찮다'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옳다라는 말은 체중을 실은 말이에요. 온몸으로 존재를 덥석 안는 거죠. 부모가 못나도 죄를 지어도 아이는 평가하지 않잖아요. "엄마 아빠 좋아!"하면서 끌어안지요. 그래서 열등감으로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아이 눈은 쳐다봐요. 안전하다고 느끼는 거죠. "괜찮다"가 엄마의 시선이라면 "옳다"는 아이의 시선이에요. 부모는 아이를 버려도 아이는 부모를 못 버리지요. ‘당신이 옳다'라는 믿음은 그만큼 강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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