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련다'처럼… 사랑도 도전도 거침없던 풍운아

조선일보
  • 송혜진 기자
    입력 2018.11.05 03:00

    [신성일 별세]
    8개 키워드로 본 신성일의 삶

    '맨발의 청춘'(1964년)처럼 거침없고 '아낌없이 주련다'(1962년)처럼 열정적이었다. 평생을 '청춘극장'(1967년)의 한 장면처럼 살았던 배우. 그래도 끝내 '떠날 때는 말 없이'(1964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 신성일(81)의 삶은 로맨스와 치정, 도전과 좌절이 뒤섞인 한 편의 영화였다. 부침(浮沈)도 염문도 많았던 인생. 그럼에도 대중에겐 마지막까지 '최고의 배우'였다. 그의 여든한 해 삶을 여덟 개 단어로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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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신성일의 영정사진이 걸렸다. 고인은 죽기 직전까지 영화 출연을 준비했다. 뼛속까지 배우이자 존재 자체가 한국 영화의 한 장르였던 그다운 마지막이었다. /사진공동취재단
    ◇얼굴값

    1960~1970년대 '신성일'이란 이름은 곧 '잘생겼다'는 형용사와 동의어로 읽혔다. 그를 키운 홀어머니와 할머니도 두고두고 같은 이유로 잔소리를 했다. "아비 없다는 소리 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고 했다는 것. 매끈한 미모에 걸맞은 '얼굴값'을 하기 위해 신성일은 학창 시절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수창국민학교 다닐 땐 성적표에서 '갑을병' 중 '갑'만 받았고, 명문학교였던 경북중·고를 졸업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1959년 8월 신필름 신인배우 오디션 현장을 찾아갔다. 지원자 2640명이 몰린 자리에서 당시 이형표 기술감독은 신성일의 얼굴을 보고 그를 신 감독에게 데려갔고, 신 감독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하고 3년 동안 고생할래?"라고 물었다. 얼굴 덕분에 바로 영화배우로 발탁된 것이다. 1960~1970년대 스크린을 흔들었던 원조 꽃미남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근성

    영화계 사람들은 그를 근성이 있었던 배우로도 기억한다. 학창 시절 할머니가 양말을 기워주면 실밥 터진 것을 보이기 싫어 한겨울에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던 스물세 살 무렵엔 덜컥 큰 작품이 찾아오지 않아 오래 애를 먹었다. 신성일은 그래도 영화사에 버티고 앉아 전화받고 청소하면서 버텼다. "언젠간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훗날을 위해 검도와 춤을 배웠고, 운동으로 몸을 다졌다. 1962년 최고의 화제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찍으면서 운이 트였다. 당시 신문기사는 앞다투어 '새로운 스타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118명의 여배우

    신성일은 곧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한국영화진흥공사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507편이고 118명의 여자주인공과 멜로 연기를 했다. 이 중에서도 윤정희(74)는 신성일과 커플 연기를 무려 99번이나 했던 여배우였다. 그는 "우린 꽤 괜찮은 콤비였다. 호흡이 착착 맞았다"고 했다. 1964년엔 당대 톱스타였던 엄앵란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했다. 엄앵란은 한 살 연상이었고 '로맨스빠빠' '아낌없이 주련다' 등에 함께 출연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배신'이란 영화를 찍으며 연인으로 발전했다. "촬영할 때 바라본 엄앵란의 입술이 너무 붉어 진짜로 입을 맞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훗날 신성일의 회고. 정점의 인기를 누렸던 두 톱스타의 결혼식에는 시민 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김동호(왼쪽)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배우 최불암(오른쪽)이 4일 신성일 빈소에 조문하러 들어오고 있다.
    김동호(왼쪽)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배우 최불암(오른쪽)이 4일 신성일 빈소에 조문하러 들어오고 있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영화계 인사들은“한국 영화계의 별이 사라졌다”고 애도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로맨스

    엄앵란과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신성일은 결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고, 1975년 두 사람은 별거를 시작했다. 신성일은 이를 두고 "서로 독립을 한 것"이라고 했다. 2011년엔 신성일이 자서전을 내면서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고(故) 김영애와의 연애 사실을 실명으로 토로해 논란이 됐다. 몇 년 뒤 그는 엄앵란에게 "미안했다"고 공개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신성일은 "나는 바람둥이라기보단 로맨티시스트"라고 했다.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영감을 얻고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베토벤

    정치를 시작하면서 그는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국회의원이던 2003년 당시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에 얽힌 업자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05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7년엔 특별사면됐다. 출감 직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씨는 "공짜 밥 잘 먹었다"면서 "(교도소) 다녀와 보니 별거 아니었다"고 했다. 출감한 이후 그는 머리칼이 구불거리도록 파마를 했다. "감옥에 있을 때 베토벤의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얻었다. 다시는 정치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머리 모양을 바꾼 것"이라고 했다. 이후 투병 생활을 하면서 다시 머리칼을 잘랐다.

    ◇체력

    신성일은 여든이 넘어서도 방송에 나와 종종 "내 체력은 50대 못지않다"고 말해왔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근육질인 팔뚝을 자랑스레 내보이기도 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식단 조절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폐암에 걸렸을 때 그는 "경북 영천 한옥에 살면서 좁고 밀폐된 방에서 어머니 영정 앞에 향을 피워놓고 7년 내내 날마다 기도를 했던 탓인 것 같다"고 했다. "암 덩어리는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도 했지만 항암 치료 도중 그는 끝내 눈을 감았다.

    ◇동지

    엄앵란과 신성일은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끝내 헤어지지 않았다. 엄앵란은 한 방송에서 "우리는 동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 남편은)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랑한 만큼 미워했고, 그래도 병마와 싸우며 함께 인생을 건너온 남자를 향한 외마디였다.

    ◇후회

    살아생전 신성일은 인터뷰에서 "평생 후회 같은 것 남기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고집스럽게 원하는 바를 이루며 한 점 후회가 남지 않을 때까지 움직여 온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고 누군가는 외로웠겠으나 모든 것이 흩어진 지금, 우리는 다시 그를 그리워한다.

    그가 4일 눈을 감으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이젠 팬들이 그에게 같은 말을 돌려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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