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休!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나를 내려놓았다

조선일보
  • 박근희 기자
    입력 2018.11.03 03:00

    [人生숙소]
    김태영 매니저의 '기림산방'
    류태환 셰프의 '토향고택'
    이욱정 PD의 '구름에'
    임형남 건축가의 '화순 양참사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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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질 녘 강원도 정선 ‘기림산방’ 주인 김종수 원장이 “뜨끈뜨끈한 방에서 자야 몸이 개운해진다”며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만약 '좋은 식사와 나쁜 숙소' '나쁜 식사와 좋은 숙소' 중 고르라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작가이자 철학가인 알랭 드 보통이 던진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식사만큼이나 숙소도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라는 것. 최근 '머무는 여행(스테이케이션·staycation)' '살아보는 여행'이 트렌드가 되면서 숙소는 더욱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 영화와 광고 속 촬영 장소를 섭외하는 로케이션 매니저, 요리 기행 PD, 식재료 따라 '산지 투어'를 다니는 셰프, 건축가의 기억에 새겨진 '잊지 못할 인생 숙소' 이야기를 들었다.

    전기 없는 오지(奧地) 산방에서의 하룻밤…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의 '기림산방'

    "몇 년 전 전기 자동차 광고 촬영 때문에 전기가 안 들어가는 마을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어요. 우연히 강원도 정선의 산기슭에 있는 '기림산방(氣林山房)'이란 곳에서 하룻밤 묵었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옛날 화전민 집이었어요. 묵을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도 안 터지고 전기가 없어 좀 불편했지만, 그날 그곳에서의 하룻밤은 잊히지 않을 만큼 특별했어요. 숲으로 둘러싸인 깜깜한 밤하늘 아래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자연 속에서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로케이션 매니저 김태영(47) 로케이션플러스 대표는 강원도 정선군 남면 유평리 해발 700m 민둥산 자락의 기림산방을 '인생 숙소'로 꼽았다.

    "그 밤에 숲속 외딴집에 있는 게 사실 무섭기도 했어요.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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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림산방의 주방에서 이따금 특식으로 제공하는 따끈한 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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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둥산 자락에 외딴집처럼 자리한 기림산방.

    기림산방은 정식 숙박 시설이 아니다. 집주인 김종수(67) 원장이 자연주의적 건강수련법 '생명온도 살리기'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수련 시설로 운영한다. 김 원장은 "20여 년 전 도시의 삶에 지쳐 쫓기듯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고 했다.

    생활 역시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낮에는 지붕과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에 의지해 생활하고 해 질 녘이면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어둠이 내리면 초를 켠 채 생활하는 게 이곳의 순리. 밤이 되면 보이는 건 달빛과 별빛, 들리는 건 흐르는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뿐이다.

    최근 수련생들이 재래 화장실 이용을 불편해해 전기 시설을 위한 전신주가 주변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곳에서의 생활은 '언플러그드(unplugged)'다. 수련이 우선이며 수련생이 많지 않을 경우, 수용 가능한 상황에 한해서만 숙박이 가능하다. 차로 15분 거리에 화암팔경(畵岩八景) 중 하나인 화암약수가, 20~30분 거리에 억새 축제로 유명한 민둥산과 야생화 군락지가 있는 하이원리조트가 있다.

    고택에서 유유자적했던 하루… 류태환 셰프의 '토향고택'

    미쉐린 맛집인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레스토랑 '류니끄'의 류태환(38) 셰프는 한 달에 한 번 식재료 여행을 떠난다. 경북 봉화를 즐겨 찾는다. "봉화는 사과, 봉화 한약우와 여름엔 은어, 가을엔 송이로 유명해요. 봉화에서 숙박하게 되면 해저리 '바래미마을'에 있는 '토향고택'에 머뭅니다. 200년 이상 된 고택이 주는 무게감도 좋지만 목화솜 이불 덮고 따뜻한 구들방에서 자고 나면 머리가 씻은 듯 개운해지는 기분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산책하거나 토향고택 뒤편에 있는 '야생화언덕'에 올라요. 마당 곳곳에 있는 시구를 읽으며 거닐다 보면 영감(靈感)을 얻기도 하죠. 토향고택에서의 하루는 치열하게 사는 제게 '쉼표' 같은 시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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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 ‘토향고택’ 툇마루에 앉아 다정하게 다과를 즐기는 집주인 김종구씨와 아내 김희선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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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ㅁ’자 모양의 경북 봉화 토향고택.
    토향고택은 조선의 선비 개암(開巖) 김우굉(1524~1590)의 현손이자 의성김씨 집성촌인 바래미마을 입향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1641~1707)의 넷째 아들 김여병을 10대조로 모시는 후손들이 산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명품고택' 지정을 받아 숙소로 개방했다.

    다섯 칸 규모의 솟을대문과 사방 일곱 칸의 비교적 큰 규모다. 영남 사대부가 'ㅁ'자형 구조를 한 안채는 400여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주인 부부가 쓰고 있다. 객실에 해당하는 큰 사랑채 등은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토향고택이란 이름은 주인 김종구(68)씨가 마흔셋 젊은 나이에 작고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아버지의 호를 딴 것. 효심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다.

    온전한 고택도 아름답지만, 집 곳곳에 주인 부부의 손길이 느껴져 더 정겹다. 전직 국어 교사이자 시인인 아내 김희선(65)씨가 지은 시를 적어 놓은 기왓장이 마당 안 눈길 닿는 곳마다 놓여 있다. '입춘대길'이라 쓰인 대문 안쪽 '토향갤러리'엔 김종구씨가 직접 빚은 도자기가 가득하다. 아내와 같은 학교 교사였던 김씨는 고택 숙박객들을 대상으로 도자기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다.

    곧 겨울이라 아쉽지만 이른 아침 야생화언덕에 오르면 고색창연한 고택 마을을 서서히 밝히는 해돋이가 감동적이다. 야생화언덕 앞 토향고택 후원엔 민속놀이터가 있다. 고택 앞 잘 가꾼 연꽃 연못 정원도 숙박객들이 좋아하는 곳. 최근 숙박객들이 많아지면서 수용이 쉽지 않아 한옥 숙박동을 증축하는 중이다. 김씨 부부는 "숙박객들의 요구에 따라 곧 산책로 내에 개별 바비큐 시설도 정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20~30분 거리에 유네스코 7대 산사 중 하나인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분천 산타마을, 청량사 등이 있다.

    고택 리조트, 안동식 조식… 이욱정 PD의 '구름에'

    KBS 다큐 '요리 인류'로 유명한 이욱정 PD는 "3년 전 늦가을 경북 안동에 있는 전통 고택 리조트 '구름에' 내 '박산정(博山亭)'에서의 하룻밤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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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 전통 리조트 ‘구름에’.
    "촬영 때문에 방문했는데 여행할 때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게 딱 맞는 숙소였어요. 방문을 활짝 열고 보이는 풍광도 좋았고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서 먹었던 식사도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한옥이나 고택은 좀 불편하다는 편견을 깨 줬어요."

    구름에는 1976년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 위기에 처한 고택 7채를 옮겨 와 숙박 체험 시설로 심폐소생 시켜낸 곳이다. 전체적인 조경은 좀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만 전통 고택 마을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호텔이나 리조트의 안내데스크에 해당하는 '까치구멍집' 위쪽으로 1800년대 건축으로 추정하는 '계남고택'을 비롯해 '팔회당재사' '서운정' '칠곡고택' '감동재사' '청옹정' '박산정' 등이 이어진다.

    이 PD가 머물렀던 박산정은 조선 선조 때 공조참의를 지낸 이지(1560~1631)가 학문 수양을 위해 1600년 초에 건립한 정자다. 원래 안동시 와룡면 도곡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고지대인 상전마을로 옮겼다가 200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리조트 내 가장 위쪽에 있어 전망 좋기로 손꼽힌다. 방 2개, 욕실 1개로 리조트 내 고택과 재사(齋舍)보다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형태지만, 툇마루에 앉으면 그 아래로 다른 고택의 기와지붕들이 겹겹이 내려다보인다. 서향인 집은 늦은 오후가 되면 맞은편 산 능선을 물들이는 노을도 감상할 수 있다.

    푹 자고 일어나 식당에서 먹는 '구름에 정식'도 이곳에 머무는 즐거움 중 하나다. 안동 양반들이 즐겨 먹던 안동의 대표 요리를 정갈하게 구성한 한 끼를 맛볼 수 있다. 한옥 바비큐, 와인바구니, 주안상 등 식도락을 즐길 만한 메뉴도 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1500여 권의 책이 있는 북카페 '오프(OFF)'도 여행 코스에서 빼놓으면 아쉽다.

    구름에 맞은편에 전통문화 체험 마을 '예움터 마을'이, 구름에 10분 거리 이내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인 월영교, 안동민속박물관 등이 있다. 구름에 숙박료는 고택 형태와 방에 따라 다양하다. 가격은 특급 호텔 수준.

    인생 숙소
    비 머금은 문화재에서 숙박… 건축가 임형남의 '화순 양참사댁'

    "얼마 전 전남 화순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 화순 양참사댁(옛 양동호 가옥)에서 하룻밤 잤어요. 건축 기행을 했던 일행들과 함께 비 오는 밤 급하게, 우연히 검색해서 간 곳이었는데 문화재에서의 하룻밤은 결론적으론 근사했습니다."

    건축가 임형남 소장(가온건축 대표)이 인생 숙소로 꼽은 화순 양참사댁은 제주 양씨 집성촌인 전남 화순 도곡면 월곡리 달아실 마을에 있다. 달아실 마을은 예부터 많은 한옥이 잘 보존돼 내려오는 곳. 172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참사댁과 그 옆 학재고택(옛 양승수 가옥)은 이곳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꼽힌다.

    집은 전형적인 남도 양반가의 형태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 너른 잔디마당을 품은 것이 특징이다. 조형식(67)·손영자(60)씨 부부가 5년 전 고택을 인수, 큐레이터인 딸 조아애(32)씨가 숙소와 야외 결혼식, 공연장, 요가 교육장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임 소장은 "양참사댁과 나란히 있는 학재고택 등 마을 내 옛집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고인돌유적지, 운주사, 화순적벽 등 볼거리와 맛집도 가까이 있어 좋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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