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냉장고 채소가 그대로… 우리 아내도 변했어요

조선일보
  • 태영호·전 북한 공사
    입력 2018.11.03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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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안병현
    지난 2016년 한국으로 와서 국가정보원 안가에서 생활하다가 그해 12월부터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산다. 사실 나는 북한에서도 특별한 직업인 외교관이었기에 큰 돈 걱정은 없이 살았다. 평양의 우리 집은 방 3칸에 큰 거실이 있는 120㎡(36.3평) 정도 아파트였다. 방, 부엌, 거실에 각각 베란다가 딸려 있어 베란다만 5개였다.

    인테리어도 서울에서 지금 사는 집 못지않았다. 중국에서 제일 좋은 가구들을 사다 넣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았는데 돈이 있어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전기, 수돗물, 난방이었다.

    평양시에서는 중심 구역인 '중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역에서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1~2시간 정도 전기가 공급된다. 전기가 들어올 때 수돗물이 나온다. 물탱크는 지상에 있고, 고층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펌프장)도 전기가 들어올 때만 작동한다.

    이렇게 물이 하루에 한 번 정도 나오니 화장실에는 큰 물탱크를 만들어 놓고 한 번에 수백L씩 물을 받아 놓는다.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은 들쭉날쭉이다. 전기가 들어와야 펌프장에서 물을 올리니 밖에 나가 있을 때는 물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도꼭지를 열어 놓고 직장에 나간다. 집에 사람이 없으니 물탱크가 꽉 찼는데도 수도꼭지를 못 잠근다. 아까운 물이 하수도로 빠져나간다. 결국 물 낭비를 하고 만다.

    물이 화장실 욕조나 물탱크에 있으니 부엌에서 쌀 씻을 때도, 설거지할 때도 바가지로 퍼서 날라와야 한다.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양치질할 때도, 심지어 용변을 보았을 때도 다 사람 손으로 물을 날라다 부어야 한다.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나는 묘안을 짜내 우리 집에 특별한 '자동 흐름식 상수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화장실에 벽돌로 150㎝ 벽을 쌓고 그 위에 녹슬지 않는 철강으로 200L짜리 물탱크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여기에 물이 다 차면 저절로 수도꼭지가 닫히는 장치를 달았다. 그 아래로 수도관을 연결했다. 물탱크를 화장실 변기나 부엌 수도보다 높게 설치했기 때문에, 탱크에 물만 남아 있으면 수도에서 물이 자동으로 나왔다. 그 덕에 전기가 없어도 우리 집에는 24시간 대체로 물이 나왔다. 이걸 보고 신기해하며 똑같이 따라서 장치를 만들어둔 동료도 있었다.

    이렇게 살았으니 서울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이 수도를 틀면 언제나 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부엌 싱크대에 설거지할 때 발로 물을 틀었다 잠갔다 하는 장치가 달린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누가 발명했는지 에디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태영호
    아파트 아래 온갖 식당과 상점이 있어 집에서 매번 요리할 필요가 없는 것도 신기했다. 북한에 있을 때 아내는 퇴근할 때 장마당이나 아파트 밑에 있는 '메뚜기장(국가에 승인받지 못한 개인 장사꾼들이 저녁 퇴근길에 채소 등을 파는 장. 보안원이 단속 나오면 피했다가 다시 와서 메뚜기장이라 부름)'에서 반찬거리와 채소를 몇 ㎏씩 사서 아파트 1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있지만 전기가 없으니 걸어야 한다. 전기가 안 들어오면 고층 건물 40~50층까지도 걸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고층 건물이 많은 평양 창전거리 같은 데선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아예 밖에서 몇 시간씩 장기나 카드놀이를 하면서 엘리베이터 작동 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는 채소 사는 일이 부쩍 줄었다. 채소 사서 집에서 요리하느니 차라리 반찬을 사 먹는 게 편하고 쌌다. 북한에서는 빠지지 않고 해먹던 김치도 이제는 만든 지 까마득하다. 냉장고는 큰데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니 집에 들어가 별로 식사할 일이 없다. 한번 사놓은 식사 재료가 줄지를 않는다.

    북한에 있을 때 겨울철 우리 집의 평균 온도는 8~10도였다. 안에 있어도 입김이 흘러나왔다. 밤에 잘 때 옷을 입고 큰 이불을 덮는다. 일어나면 그 무게에 눌려 어깨가 다 아팠다.

    한국 주부들의 삶이 궁금해서 이곳 동료에게 물어보니, 부인들이 등산 다니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커피집에서 여유를 즐긴다고 한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이 북한보다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특히 북한 여성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힘들게 사는 주부도 많겠지만, 최소한 내 눈에 한국 주부는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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