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지옥의 20년' 증언… 딸은 눈물도 말랐다

입력 2018.10.31 03:01

[Femicide 살해 위협받는 여성들의 공포]
'강서구 살인' 둘째딸 국회 증언

딸은 울지 않았다. 가림막 뒤에 선 채, 한 가족이 오래 참은 고통을 20분간 오열 없이 증언했다. 30일 오후 서울 국회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장에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둘째딸 A(21)씨가 나왔다. 의원들이 "가정폭력의 현주소를 알려달라"고 출석을 요청한 데 따라서였다.

이날 A씨는 "엄마가 거처를 옮겨도 아버지가 흥신소를 동원해 집 앞에서 칼을 들고 기다렸다"며 "3년 전 용기를 내 신고했는데 가해자가 2시간 만에 풀려났다"고 했다. 처벌 수위를 묻는 어머니에게 경찰은 "(위협만 했지) 실질적인 가해는 없었으니 처벌이 미미할 것"이라며 "앱을 깔라"고 했다. 위험할 때 다시 신고하란 의미였다.

서울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둘째 딸(우산 뒤)이 30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여성가족위 국정감사에 참석하고 있다.
지옥같던 가정폭력 국회 증언 - 서울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둘째 딸(우산 뒤)이 30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여성가족위 국정감사에 참석하고 있다. A씨는 신원 노출을 피하기 위해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동해 가림막 뒤에서 진술했다. /이덕훈 기자
A씨 자매들은 어머니가 숨진 이튿날 "아버지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는 국민청원을 냈다. 지금까지 111만 명이 동의했다.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의원들에게 A씨는 "제2, 제3의 피해자가 없도록 피해자를 보호하는 구체적인 법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평범한 여성이 연애·동거·혼인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한 해 살인사건 열 건 중 한 건을 연인이 저질렀다. 전·현 배우자와 동거남이 저지르는 살인은 아예 집계조차 안 된다.

페미사이드 피해자 한 사람 뒤에는 더 많은 다른 피해자가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걸 숱하게 목격하며 자라야 하는 수많은 아이다. 황정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사는 "페미사이드를 부르는 가정폭력은 해당 여성뿐 아니라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잔혹한 영향을 주는 심각한 범죄인데 우린 아직도 이걸 가볍게 본다"고 했다.

◇매 맞는 아이·엄마, 한 해 3000명

최근 3년 만 18세 이하 가정 폭력 피해자 외
이날 여성가족부·경찰청이 국회 김현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를 접수한 18세 이하 어린이·청소년만 2015~2017년 사이 8914명에 달했다. 다음 세대 한국인들이 한 해 3000명 가까이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피해는 그 몇 배로 추정된다. 부모가 자녀를 방치·폭행하는 '아동학대'와 달리, '가정폭력' 신고는 아이와 엄마가 동시에 아빠에게 맞는 경우다. 경찰은 피해자들을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쉼터)로 연계해주는데, 작년에만 매 맞는 엄마 2055명이 때로는 혼자, 때로는 아이 손을 붙잡고 남편의 매질을 피해 쉼터로 갔다.


 ◇우리 곁의 폭력

엄마와 함께 쉼터에 사는 B(6)군은 지금도 갖고 놀던 장난감이 고장 나면 "나 아빠한테 죽어"라며 얼굴이 굳는다. 엄마가 눈앞에 안 보여도 "엄마가 죽은 줄 알았다"고 겁에 질린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엄마와 함께 수시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얻어맞은 후유증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례가 '나와 동떨어진 얘기'라고 생각지 말아 달라"고 했다. 피해자들이 숨죽이고 있을 뿐, 우리 주변에도 제2, 제3의 강서구 모녀가 많다는 것이다.

가정폭력 가해자 C씨도 겉보기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공무원 아내와 맞벌이하는 '멀쩡한' 가장이었다. 민얼굴은 달랐다. 그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부터 때리기 시작해, 아이가 태어나자 둘을 같이 때렸다. "맞은 티가 안 나야 한다"며 아내와 돌도 안 된 갓난아기를 두꺼운 이불에 뒤집어씌워 놓고 발길질했다.

피해자들에겐 가족이 곧 지옥이지만, 이들을 돌보는 국가 대책은 사실상 거의 없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 일부에게 쉼터와 심리치료, 재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정도다. 엄마를 따라 도망쳐 나온 아이들에게 유치원·어린이집 교육비도, 기본적인 양육비도 지원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빠의 매질을 피해 엄마와 도망칠 때 교육 당국이 아이를 비공개로 전학시켜주는 '비밀 전학'이 거의 유일한 보호 조치지만, 이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자녀가 몰래 전학 간 학교에서 실수로 친권자인 아버지에게 각종 안내 문자를 보낸 사례도 있다. "아버지가 찾아와 난동을 피우면 어떻게 하느냐"며 전학 받길 꺼리는 학교도 있다. 서순임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회장은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가 분노와 무력감, 적개심 때문에 커서 본인도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잦다"면서 "이런 괴물 같은 가정폭력을 우리 사회는 부부 사이 문제로 본다"고 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