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페미사이드

조선일보
  • 이명진 논설위원
    입력 2018.10.31 03:16

    1994년 유명 미식축구 선수 0.J 심슨의 전 아내가 친구와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심슨이 범인이라는 단서 중엔 그가 전 아내를 상습 폭행해 고발된 적 있다는 게 있었다. 심슨은 현장에서 도망가다 붙잡혔는데도 무죄가 됐다. 심슨 변호인단이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 중 실제 아내를 죽인 경우는 0.1%'라는 통계로 배심원단을 속였다. 실은 폭행당하던 아내가 살해당했을 때 남편이 범인인 경우가 80%였다.

    ▶서울에서 엄마를 살해한 아빠를 사형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은 자매의 사연은 기막히다. 엄마는 수십년간의 폭력, 이혼 뒤 여섯 번의 이사, 열 몇차례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어도 아빠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자매에게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죽여도 6개월이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한다. 아빠를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국가와 법에 대한 자매의 마지막 호소다. 

    [만물상] 페미사이드
    ▶이 사건 이후 이틀 만에 부산에서 30대 남성이 헤어진 연인 가족을 모두 살해하는 엽기적 사건이 또 일어났다. 죄 없는 여성들이 남편·애인·동거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범죄, 페미사이드(femicide)다. 그제 잇단 사건에 분노해 모인 여성들이 든 손팻말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 묻지 마라' '국가가 가해자다'

    ▶미국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는 여성이 '친밀한 관계 남성'에게 당할 수 있는 폭력 징후를 알아채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당신이 입고 먹는 것을 좌지우지하려 든다면' '허락 없이 전화·이메일을 들여다본다면' 의심해볼 만하다는 식이다. 한 해 1000만명 넘는 폭력 피해자가 발생하고, 1분에 20명꼴이라는 통계 설명도 있다. 우리는 통계조차 없다. 시민단체가 언론 보도를 일일이 뒤져 "지난 9년간 친밀한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824명, 살인미수에서 살아남는 건 602명"이라고 했다. 실제는 몇 배 더 될 것이다.

    ▶매 맞는 여성이 사회문제가 된 건 20년도 넘는다. 형사 처벌뿐 아니라 가해자 격리, 접근 금지 같은 임시 조치도 있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해도 임시 조치가 이뤄지는 건 100명 중 1명도 안 된다. 구속 상태로 수사받는 가해자 비율도 1%에 못 미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칼로 물 베기' '가정사'쯤으로 치부해온 국가의 무관심과 사회의 잘못된 인식 탓이다. 그 틈새로 야만과 폭력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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