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원인 모르고 방치한 어지럼증

입력 2018.10.28 06:03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의미 없이 그려진 듯한 노랗고 파란 원색 무늬의 박스 안으로 들어서면 은색 발판이 눈에 띈다. 위치에 맞게 발을 정렬해두고 서 있노라면 의료진이 다가와 등 뒤에 마치 낙하산 같은 줄을 매달아준다.

“발판이 흔들릴 거예요. 눈을 감고 몸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보세요.”

발판은 위로, 아래로, 뒤로, 앞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움직임이 멈출 때면 머리가 울리는 듯이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간혹 어지럼증을 심하게 겪는 환자 중에는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균형을 얼마나 잘 잡는지 보는 듯한 이 검사의 이름은 동적자세검사(CDP)다. 전문 어지럼증클리닉에나 있을 법한 이 검사기기를 통해서 환자의 균형감각을 확인한다고 한다. 기기에 무심하게 그려진 듯한 무늬 역시 시각적으로 교란을 줘 균형감각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다. 세란병원 뇌신경센터·어지럼증클리닉 박지현 진료부장의 설명이다.

“간단하게는 우리 몸의 균형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의 이상 유무를 보는 검사이기도 하고요. 발바닥에서 척추로 이어지는 균형에 대한 체성감각을 모두 확인하는 검사입니다. 평범한 상황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있어도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지를 쉽게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눈을 감은 상태에서 발판을 움직이면서 체성감각을 교란시키면 균형감각이 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어지럼증을 앓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에 적합한 검사입니다.”

“어떤 유형의 어지럼증인지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어지럼증 환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얘기다. 올해 아들의 결혼식을 치렀던 하은숙씨는 15년 넘게 무시하듯 방치해온 어지럼증 때문에 큰일을 겪었다. 아들의 결혼식장에서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것이다.

“한복 차려입고 하객에게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세상이 핑 돌면서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볼까봐 며느리 될 신부가 있던 신부대기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토하기까지 했어요.”

하씨가 맨 처음 어지럼증을 겪은 것은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때때로 30분, 1시간 정도 격한 어지럼증이 찾아오곤 했지만 또 어지러운 순간을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듯 일상을 즐길 수 있었다.


전문 클리닉 가보니…


“몸이 허해지면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르고, 또 가본들 무슨 소용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내버려두곤 했다가 사단을 겪었습니다.”

대다수 어지럼증 환자들이 그렇다. 어지럼증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질병 중 하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지럼증 자체는 증상일 뿐 질환이 아니지만 워낙 다양한 질환에서 어지럼증 증상이 나타나는 만큼 한 환자가 겪는 어지럼증의 원인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어지럼증의 원인을 찾기 쉽지 않다는 얘기는 곧 환자들 역시 어지럼증의 원인을 굳이 찾지 않으려고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활에 다소 지장이 있더라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어지럼증은 방치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어지럼증 증상이 잦고 강해지면 그제서야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일 년에 며칠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어지럼증을 겪어온 기자 역시 어지럼증 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박지현 세란병원 진료부장은 “종종 30년, 50년 동안 어지럼증을 앓고 있다가 이제야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를 만나곤 한다”고 말했다.

“어지럽다고 하면 금세 빈혈을 의심하거나 ‘몸이 허해서’ 그런 거라고 치부해버리는 분위기가 있었잖아요. 영양섭취를 제대로 못하던 옛날이야 맞는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영양부족이거나 빈혈 때문에 생기는 어지럼증은 거의 없어요. 반면에 조금만 일찍 병원에 와서 검사를 하고 정확한 진단을 받고 제대로 된 치료 과정을 거치면 거의 다 나을 수 있는 것이 어지럼증이기도 해요. 뒤늦게서야 어지럽지 않은 삶을 찾으러 온 환자를 보면 안타깝죠.”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이 늘어난 이유

사실 어지럼증 환자들이 쉽게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지럼증 증상이 심해질 때면 동네 이비인후과 의원에 찾아가보곤 했지만 신경안정제를 비롯한 약물 몇 가지를 처방받을 뿐 적절한 치료를 받기는 어려웠다. 약을 먹어도 어지럼증이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면 “어지럼증은 평생 재발하니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 아닌 조언을 믿고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최근 10여년간 한국에서도 어지럼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어지럼증 전용 검사실을 개설하고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을 운영해온 박지현 진료부장은 맨 처음 어지럼증클리닉을 열었을 때 주변에서 의아해하는 반응을 겪었다고 말했다.

“어지럼증도 하나의 질환처럼 정밀한 진단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지럼증 치료로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미국에서 따로 공부해 진단 방법과 치료 방법을 익혀 들여왔습니다.”

어지럼증을 치료하고자 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이에 맞춰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이유는 병의 치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치료’는 생존과 직결된 질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생존을 넘어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병원을 찾고 치료받는 분위기가 생기며 어지럼증 치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종합검사가 필요한 이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어지럼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 수는 85만8884명에 달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지럼증의 원인에는 매우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주요한 질병과 그로 인한 어지럼증을 대강 나열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전정성 편두통으로 인한 혈관성 어지럼증, 대개 이석증이라고 불리는 양성자세현훈, 몸의 평형을 감지하는 전정기관에 있는 전정신경에 염증이 생기는 전정신경염으로 인한 어지럼증, 뇌졸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과성 뇌허혈증으로 인한 어지럼증이 있다. 복합 감각성 균형장애라는 것도 있고 심리적 문제에서 비롯된 어지럼증도 있다. 원인이 매우 다양한 데 비해 어지럼증의 증상은 크게 차별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증상을 완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신경과, 이비인후과를 비롯해 신경정신과, 내과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검사와 진단이 필요한 이유다.
어지럼증 검사는 증상이 나타날 때 받는 것이 좋지만 여의치 않다면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도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기자 역시 불규칙적이지만 장기적인 어지럼증을 앓아왔던 입장에서 어지럼증 원인의 실마리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컸다.

혈압과 채혈을 끝내고 15분간 진행된 동적자세검사가 끝나자 영상안진검사(VNG)가 이어졌다. 안진(眼震·nystagmus)이란 말 그대로 눈동자의 흔들림을 일컫는다. 상당히 많은 어지럼증은 눈의 흔들림을 잘 관찰할 때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누워서 한곳을 응시하고, 앉아서 표적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환자가 자세를 바꾸고 자극을 받으며 생기는 안진을 의료진이 꼼꼼하게 기록한다. 안진의 유형에 따라 어지러움의 종류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진검사 중에는 귀에다 뜨거운 바람이나 물을 넣어 직접 전정기관을 자극하는 방법도 있는데 정상적인 경우에는 곧바로 어지럼증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간혹 구토를 할 정도로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아예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경우도 있다.

안진검사가 끝나면 밀폐된 공간에서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 평형감각 기능을 알아보는 로테이토리체어 검사도 받는다. 이 검사를 받다 정신이 흐려지는 환자도 간혹 나온다. 의료진들이 “생각나는 새 종류를 말해달라”거나 환자에게 간단한 사칙연산을 시키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다.

검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경계 질환으로 어지럼증을 앓는 환자는 최소 10%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층에선 흔한 일은 아니지만 종합적인 검사를 위해 뇌 정밀 MRI 검사까지 이어졌다. 30분 정도 진행된 MRI 검사를 통해 뇌의 단면은 물론 뇌혈관에 있는 이상까지 샅샅이 확인할 수 있다. 검사를 받기 전에 의사와 상담하는 문진 시간에 “검사만 따져도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쏟고 나면 온몸에 있는 어지럼증의 발현 요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바 있다. 박지현 세란병원 진료부장은 “상당수는 전정기관, 귀에서 평형을 담당하는 기관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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