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지미도, 이영애도 찾았던… '출산의 메카' 제일병원 문닫을 위기

조선일보
  • 이혜운 기자
    입력 2018.10.27 03:00

    국내 첫 여성전문병원, 개원 55년만에 매물로 나와

    국내 첫 여성전문병원, 개원 55년만에 매물로 나와
    대한민국 ‘출산 왕국’으로 군림한 제일병원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일까. ① 지난 25일 오전 서울 중구 제일병원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제일병원은 최근 저출산에 이은 경영 악화로 매각이 진행 중이다. ② 1963년 개원식에 참석한 이병철(오른쪽) 삼성그룹 회장과 이동희(오른쪽에서 다섯째) 제일병원 이사장. 이 이사장은 이 회장의 조카다. ③ 제일병원 신생아실 내부 모습. 새해가 되면 사진기자들은 가장 먼저 태어나는 신생아 촬영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 / 장련성 객원기자
    #1. 지난 24일 서울 중구 묵정동에 있는 '제일병원' 병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불은 꺼져 어두웠고, 문도 굳게 잠겼다. 병실 말고 다른 병원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임산부로 북적이던 산부인과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소아과도 사람이 적었다. 여기가 '몇 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진료가 불가능하다'던 제일병원이 맞나 싶었다. 병원 벽면 곳곳에는 '더 이상 무너지면 안 됩니다. 제일병원 직원들이 지켜야 합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직원 식당 옆에는 "이재곤 이사장과 이사회는 당장 전원 사퇴하고 병원 경영 정상화의 시작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2. "10월 1일부터 병동 운영에 차질이 예상되어 입원 및 수술, 분만이 어려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내원하셔서 주치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달 출산을 앞둔 임부들에게 이 같은 문자가 발송됐다. 주치의들은 당분간 진료 정상화가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 임부들에게 전원(병원을 옮기는 것)을 권하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는 개원 이래 처음으로 분만실을 축소 운영해 응급 임부만 분만이 가능하다. 올봄 이미 간호사 50여명이 집단 사직하는 등 간호 인력은 지난 3월 대비 30% 줄었고, 20년 이상 고참 의사들도 상당수 이직했다. 임부 A씨는 "첫째 아이를 낳았던 곳이라 둘째도 이곳에서 낳고 싶었는데 병원 사정이 어렵게 돼 처음 가는 병원에서 처음 보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려고 하니 불안하다"고 말했다. 난임 치료를 받는 B씨도 "올봄 이후 담당 의사가 한 차례 바뀌었다"며 "병원에 보관 중인 수정란이 있어 전원하기도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맘 카페에는 "어디에서 출산할지 고민이다"라는 제일병원에 다니는 산모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국내 첫 여성전문병원인 '제일병원'이 개원 55년 만에 폐원 위기에 처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대한민국 신생아의 2%가 태어나던 곳, 분만 건수 부동의 전국 1위를 지키던 곳이다. 영화배우 김지미와 이영애 등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이곳에서 출산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등 삼성가(家) 3~4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배우 고현정씨도 신세계그룹 자녀를 이곳에서 낳았다.

    전국에서 가장 미역국이 맛있다는 곳, 새해가 밝으면 전국 사진기자들이 가장 먼저 태어난 아기를 찍기 위해 모여들던 대한민국 '출산 왕국'이 왜 위기에 처한 걸까.

    삼성가 분리 이후 경영 위기

    제일병원 창립자인 고(故) 이동희 이사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조카다.

    이 이사장의 자서전 '뿌리깊은 꿈'에 따르면, 현 제일병원 터와 그 주위 땅 상당 부분은 삼성그룹의 뿌리인 제일제당(현 CJ) 소유의 나대지였다. 당시 대학병원 교수로 일하던 이 이사장이 병원을 짓고 싶어하자, 이 회장은 먼저 교통이 편리한 안국동의 제일제당 땅을 병원 부지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당장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묵정동의 현 제일병원 부지를 택했고, 이 회장은 땅을 싼값에 줬을 뿐 아니라, 지불도 병원 완공 후 분할 납부하는 조건으로 편의를 봐줬다. 그렇게 1963년 12월 제일병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던 1996년 3월 이 이사장의 폐암이 발병했다. 사망 직전이던 5월 그는 유언장을 통해 "제일병원의 경영권을 삼성그룹에 이양키로 결심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제일병원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은 이 이사장의 사촌 동생이다. 이 회장은 이 같은 사촌 형의 유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2005년 11월 1일 제일병원은 다시 삼성그룹 계열 병원에서 분리됐다. 이름도 '삼성제일병원'에서 '제일병원'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사장도 송자 전 연세대 총장 등 외부 인사에서 이동희 이사장의 장남인 이재곤 현 이사장으로 바뀌었다.

    삼성과 제일병원 관계자는 "삼성그룹 산하에 있을 때도 삼성이 이 이사장의 경영을 후원해주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이사장이 이제는 독립적으로 경영하고 싶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다시 분리가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서울병원과 삼성제일병원은 재단을 따로 분리해 운영해왔기에, 삼성그룹에서 분리되는 과정도 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삼성가에서 분리된 후 경영 사정은 악화됐다. 제일병원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병원 총 부채는 327억원에서 1280억원으로 4배 증가했다. 금융 대출도 53억원에서 950억원으로 18배 증가했다. 이로 인한 이자 비용도 10년간 10배 증가, 6년간 당기순이익도 연속 적자다.

    지난 3월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유동 부채가 유동 자산을 761억원 초과했다. 이렇게 된 배경은 먼저 2007년부터 진행된 무리한 투자에 대한 압박이다. 당시 경영진은 낙후된 병원 건물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는 동시에, 여성암센터, 건강검진센터, 임상연구소 등을 설립하며 연구개발(R&D)에 뛰어들었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분만 위주의 진료 시스템을 탈피한다는 방향은 맞았지만, 다른 병원들이 이미 특화한 분야에 뒤늦게 뛰어들었다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1100억원에 이르는 과도한 부동산 매입 비용도 발목을 잡았다.

    병원 내에서는 삼성가 분리 이후 브랜드 가치가 하락한 점도 원인이라고 말한다. 제일병원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삼성제일병원이라는 브랜드를 환자들이 높게 샀는데, 그 브랜드가 사라지자 병원 가치가 떨어졌다"며 "의대가 없는 개인 병원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저출산으로 인해 분만 건수가 줄어든 점 등도 큰 원인이다.

    국내에서 태어난 아기는 1970년 100만명에서 지난해 35만명으로 급감했다. 이와 함께 제일병원 분만 환자 수도 2012년 6808명에서 지난해 4202명으로 38% 감소했다. 김재연 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개최해 "분만 수입이 과거에 비해 10분의 1로 줄었는데 이를 반영한 수가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를 실천하지 않을 경우 제일병원처럼 분만실 폐쇄는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영 진단 과정에서의 잡음

    제일병원의 위기설은 예전부터 나왔지만 실질적으로 위기 상황이 가시화된 것은 올해 5월부터다. 제일병원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의료·공공 분야 전문 컨설팅 회사인 엘리오앤컴퍼니에 경영 진단을 의뢰했고, 그 이후 의료진 등에 대한 임금 삭감이 13~60% 이뤄졌다.

    이 부분에 대해 경영진과 노조의 충돌이 있자 노조는 6월부터 파업에 들어갔고 경영난은 심화됐다. 이 과정에서 오랜 경험을 지닌 의사와 간호사들이 상당수 이직했다. 환자 C씨는 "제일병원 대표의사들이 이직하면서 관련 환자들도 많이 빠졌다"며 "올해 3월까지만 해도 예약 환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예약 잡기가 쉽다"고 말했다.

    현재 제일병원은 매물로 나온 상황이다. 인수 협상자 2~3곳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자로 거론된 동국대 관계자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며 "8월 말에 인수 얘기가 오고 갔지만 병원 측에서 전체 직원에 대한 고용 유지를 요구해 현재는 인수 이야기가 중단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병원 노조 측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경영진에서 이사장 일가가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일병원 관계자는 "이사장 가족은 새로운 투자자가 나오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이라며 "일단은 병원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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