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문 대통령 유럽 순방 사실상 외교 事故 아닌가

조선일보
입력 2018.10.22 03:20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 51국 정상들이 참석한 브뤼셀 아셈(ASEM) 정상회의가 19일 의장 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CVID) 방법'으로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핵무기뿐 아니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도 CVID 방식으로 없애라고 요구했다. 'CVID'의 핵심은 '검증'이다. 검증하지 않으면 핵을 실제 폐기했는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다. 북한은 CVID를 극력 피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언제부터인지 CVID 대신 '완전한 비핵화'라는 말만 하고 있다. '검증'을 뺀 것이다. 우리 정부가 핵 못지않게 치명적인 생화학무기 폐기를 북에 요구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아셈 정상회의가 대신 내줬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목소리다. 한국민을 한국 정부가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대변하는 것 같다.

아셈 의장 성명은 북이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조속히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유럽 순방에서 대북 제재 이행이 아니라 거꾸로 제재 완화 부탁을 하고 다녔다. '북 비핵화가 돌이킬 수 없는 정도가 됐을 때'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무게중심은 "대북 지원과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북핵 군사 옵션을 언급할 때도 외교와 대화를 강조해온 국가들이지만 문 대통령의 제재 완화 요청은 잘라서 거절했다. 제재와 CVID 원칙만이 북핵을 없앨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IAEA 전 사무차장은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란 '핵무기가 반출되고 우라늄 농축 시설이 해체된' 단계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제재 해제, 미·북 수교 등 북이 원하는 보상이 제공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 비핵화는 '김정은 의지'라고 문 대통령이 전하는 것과 몇 마디 말이 전부다. 북은 비핵화 실천 방안을 논의할 미·북 실무회담에는 응하지 않고 트럼프·김정은 쇼에만 공을 들이고 있다. 정말 핵 포기 결단을 내렸다면 핵 신고를 하고 폐기 절차와 방법을 본격 논의해야 한다. 그런 기미는 전혀 없다.

문 대통령이 프랑스·영국 정상에게 대북 제재 완화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국제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고 엉뚱한 부탁을 한 것이다. 그것이 아셈 정상회의를 통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한국 외교는 '남북'에 빠져 방향 감각을 잃은 채 북핵 해결의 정도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이번 유럽 순방은 사실상 외교 사고(事故)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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