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기록 들춰보니, 천민과 여인들의 삶이 있었다

입력 2018.10.20 03:01

조선 말의 '檢案' 치밀하게 탐구

'100년 전 살인사건'
100년 전 살인사건|김호 지음|휴머니스트|400쪽|2만2000원

"여우를 잡아왔으니 껍질을 벗겨야 해!" 1899년 5월 28일 밤, 충청도 면천군 송암면의 한 주막에 헐레벌떡 나타난 젊은이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잡았다는 '여우'를 보고 기겁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시체였다. 청년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해 나를 홀렸다"고 우겼다.

면천군수 이덕용이 현장으로 가 조사했다. 19세 조태원은 파락호로 마을 사람에게 주정과 행패를 일삼던 자였다. 그가 주막에서 우연히 만나 수작을 부리던 여인을 따라가 겁간하려다 저항하는 여인을 폭행하고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태원은 "술에 만취해 벌어진 일"이라고 항변했으나 정상이 참작되지 않았고 끝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여인의 애달픈 삶이 드러난다.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사주를 봐 주는 점쟁이 여인이었는데 늘 쉽게 남성들의 폭력에 노출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비롯해 16건의 조선 말 살인사건을 발굴해 신간 '100년 전 살인사건'에 실은 사람이 김호(51)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다. '왜 우리 역사책에 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양반과 귀족들인가?' 대학가에서 '민중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1980년대, 서울대 국사학과에 다니던 김 교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양반의 성리학적 '정신사' 대신, 중인과 천민처럼 소외받던 사람들의 '몸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어떨까!"

19세기 말 김준근의 그림. 조선 말의 조사관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검시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19세기 말 김준근의 그림. 조선 말의 조사관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검시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휴머니스트
지난 18일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그건 참 맹랑한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생활사를 깊이 파고들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을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로 잡았지만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이 조선 후기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됐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그는 국내 보기 드문 의학사 연구자가 됐다.

자료를 찾던 중 서울대 규장각에서 희한한 문서 더미가 눈에 띄었다. 500여 종 2000여 권이 남아 있는 방대한 분량의 '검안(檢案)' 문서였다. 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작성된 것이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지방관이 출동해 검시와 관련자 취조를 하고 작성한 문서입니다. 처음엔 그냥 의학 관련 기록이겠거니 생각하고 맡아 조사했지요."

물론 그 속에는 '흉기를 숯불로 달군 뒤 고농도 식초를 부으면 혈흔이 나타난다' '목매 자살했다면 서까래에 앉은 먼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야 한다'는 등 치밀했던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실상이 러난다. 한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범인과 목격자,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기록으로 남지 못했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있는'민중실록'이라 할 만했다.

의학사 연구자 김호 경인교대 교수.
의학사 연구자 김호 경인교대 교수. /이태경 기자
"여성이든 천민이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들 할 말을 다 하면서 살았더군요." 그 목소리에는 100여 년 전 민초들의 굴곡진 일상과 억울함, 울분, 거짓말, 애증, 희로애락, 날것의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1904년 문경에서 상놈에게 성폭행당할 뻔하자 목을 맸다는 양반 부녀자는 알고 보니 남편이 죽이고 자살로 위장한 것이고, 그 '상놈'과 5년 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마을 권력을 장악한 특정 가문이 똘똘 뭉쳐 수사를 방해하기도 했고, 약자끼리 상부상조하며 뭉친 계(契)가 또 다른 약자를 핍박하는 일도 있었다. 집 문서를 팔아먹은 하인이 상전을 죽이는가 하면 악의적인 무고로 재물을 빼앗으려는 음모가 횡행했다.

김 교수는 사위를 살해한 딸을 죽인 친정어머니와 추문을 듣고 자결한 과부가 주변의 칭송을 받은 사례를 들며 "조선의 성리학 이념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하층민에게까지 자리 잡았지만, 하층민은 자신의 의(義)와 열(烈)을 증명하기 위해 과잉 감정을 쏟아내는 인정 투쟁에 나섰다"고 했다. 이것은 이미 조선 사회의 이상이 현실과 멀어졌고, 그 속에서 서서히 변혁의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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