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파고든 과도한 'PC운동'… 미국인들은 피곤하다

조선일보
  • 이철민 선임기자
    입력 2018.10.17 03:00

    인종·종교·성적 취향·외모 등에 자유로운 발언 못하는 분위기
    오해 받지 않으려 자기 검열

    지난 6월 미 대법원에서는 결혼 케이크를 둘러싼 소송에 대한 판결이 나왔다. 미국 콜로라도주의 한 빵 가게 주인이 동성(同性) 커플의 결혼 케이크 주문을 "내 종교적 신념에 반(反)한다"며 거부했다가, 다양한 성적(性的) 취향에 대한 '반(反)차별법'을 위반한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이다. 빵 가게 주인은 이 문제로 6년이나 송사에 시달리다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동성 결혼에 대한 종교적·철학적 반대는 보호받는 표현의 자유"라는 판결을 받아 승소했다.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한 남자 교수(76)는 만원(滿員)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층을 눌러줄까요"라는 질문에 "여성 속옷 코너"라고 답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 말을 들은 한 여교수가 전체 교수 회의에서 '여성을 소재로 한 불쾌한 발언'이라고 문제를 삼으며 그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남자 교수는 "이런 미친 분위기는 농담도 못 하게 하고 학회도 망친다"며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지난 8월 오리건대에선 학생회 간부들이 교내에 있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어이없게도 그의 연설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에 있는 "언젠가 나의 네 아이가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는 나라에 살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문제가 됐다. 학생회 측은 "킹 목사 연설은 성(性)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다양성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성·종교 차별 등 다른 문제도 많은데 왜 인종차별 문제만 다뤘냐는 것이다.

    인종이나 종교, 성적(性的) 취향, 외모 문제에서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없애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은 미국 주류 사회의 뜨거운 이슈다. 주류 언론은 이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그러다 보니 많은 미국인들이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아예 말을 삼가거나 어휘 선택에서 과도하게 자기 검열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뚱뚱하다(fat)' '맹점(盲點·blind spot)'과 같은 많은 단어들이 '정치적으로 부당한' 금기어가 됐다. 일상적인 표현과 행동이 일일이 '정치적 올바름'의 도마에 오르게 되자 "편견을 다른 편견으로 교체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은 PC(정치적 올바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일 비영리단체인 '모어 인 커먼'이 발표한 예일대 조사에 따르면, 심층 인터뷰한 미국인 3000명 중에서 80%가 "PC가 미국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번 조사는 미국인들에게 주요 이슈에 대해 개인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자유가 있는지, 사회 전반에서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압력이 있는지 물었다. 워싱턴포스트는 15일 "공산주의 체제에서 말 하나하나 조심해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에서도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가 아니면 일상 대화에서 자기 검열한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이 조사에서 PC 이슈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전체 미국 인구의 8%에 불과했다. 대체로 고(高)소득·고학력에 좌파 행동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이었다. 연구원들은 "이들이 주도하는 PC 논쟁은 월세를 걱정하며 사는 80%의 '탈진한 다수(exhausted majority)'에겐 멀고도 불편한 얘기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2016년 대선이 미국인들의 PC에 대한 피로감과 거부감을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주류 언론들로부터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언론과 여론조사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당선됐다. 하버드대 정치학과의 야스카 멍크 교수는 "엘리트 매체나 기관들이 진보적 소수와 대중 간 이런 인식의 괴리를 깨닫지 못하고 극소수의 관심에 집중하면 결국엔 다수로부터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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