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밥이 된다 해도 나는 먼 바다로 가리라

입력 2018.10.13 03:00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김명인 지음|문학과지성사|132쪽|9000원

소월시문학상을 비롯해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김명인(72)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을 냈다. 첫 시 '멸치처럼'부터 생사(生死)의 먹이사슬에서 약자의 처지에 놓인 인간의 비애를 노래했다. '한 번도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멸치/ 저걸 덮치려고 고래까지 아가리를 활짝 벌린다'는 것. 시인은 건조된 멸치를 보며 '머리를 떼면 흑연 같은 속셈이 딸려 나와/ 멸치는 곤곤해진다'며 '촘촘하게 엮인 투망을 덮어쓰는 절기에도/ 물기 다 거둔 멸치는 건건하다'고 했다.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정과리는 이 시에 사용된 어휘 '곤곤'과 '건건'을 섬세하게 풀이했다. 처음 시를 읽을 때 '멸치는 곤곤해진다'에서 '곤곤'은 '잠잠'으로 읽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곤곤(困困)'은 '몹시 곤란하거나 빈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곤곤(滾滾)'으로 읽으면 '흐르는 큰물이 출렁출렁 넘칠 듯하다'가 된다. 멸치는 조용하고 빈곤하지만 나름 큰물에서 놀아본 몸이다.

'물기 다 거둔 멸치는 건건하다'에서 순우리말 '건건'은 '감칠맛 없이 조금 짜다'는 뜻이지만, '건건(乾乾)'은 '바짝 말랐다'가 된다. '건건(蹇蹇)'이라 읽으면 '어려움을 당하여 몹시 괴롭다'와 '매우 충성스럽다'는 상이한 뜻을 품는다. 또 '건건(虔虔)'으로 읽으면 '항상 조심하고 삼가는 모양'이 된다. 멸치는 맛없이 짜고 말라빠진 미물에 불과하지만 절제된 삶을 지향해온 시인의 초상을 담고 있는 셈이다. 김명인은 한 단어에 여러 겹의 뜻을 담는 작법으로 의미의 확장과 통합을 거쳐 웅숭깊은 말맛을 전하는 데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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