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이 빌려준 '만 원의 온기'

입력 2018.10.12 16:57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퇴직한 이춘옥(63)씨는 여의도에 있는 숲연구소에서 ‘숲 해설가’ 교육 과정을 밟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0일 이씨는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자원봉사자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여기서부터 27㎞ 떨어진 여의도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차를 태워준 자원봉사자 차량에 휴대전화·지갑을 두고 내렸다. 누군가에게 연락할 수도, 그렇다고 다른 교통편으로 이동할 수도 없이 발이 묶인 상황. "신용카드 하나, 현금 1000원짜리 한 장이 없었고 도와달라고 부탁할 휴대전화도 안 보이니 눈 앞이 깜깜했어요. 요즘 세상에 생면부지 할머니가 ‘돈 빌려달라’고 말 붙이면 거들떠나 볼까도 싶었고…"

고민하던 이씨의 눈에 공릉2치안센터가 들어왔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치안센터에는 마침 노원경찰서에서 파견을 온 박현주(42)경사가 있었다. 중학생들과의 상담이 막 끝난 터라 박 경사는 정복이 아닌 ‘사복’차림이었다.

"여기 경찰관 계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만원만 빌려주세요. 내일까지 꼭 갚을게요."
현금이 없기는 박 경사도 마찬가지였다. 노원서에서 치안센터로 잠시 파견을 나온 참이라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만 챙기고 나왔기 때문이다. 박 경사는 이씨와 함께 근처 편의점으로 간 뒤 현금인출기(ATM)에서 딱 만 원을 인출했다.

이씨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름,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집 주소까지 적어 박 경사에게 건넸다. "꼭 갚겠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이튿날 이씨는 빌린 돈 만 원을 박 경사에게 송금한 뒤 "고맙다"는 문자메시지까지 따로 보냈다.

만원이 준 온기는 이씨 마음 속에 오래 남았다. 하루, 이틀, 보름이 지나도 고마움이 가시지 않았다. 감사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이씨는 노원경찰서 홈페이지 게시판을 찾아 만원을 빌리게 된 사정을 썼다.
"나이든 할머니의 말을 믿어준 것도 고맙고, 갑자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마음씨와 행동이 경찰관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거주하는 이춘옥(63)씨가 자신에게 귀가 교통비를 빌려준 노원경찰서 여성청소년과 박현주(42) 경사에게 보낸 고구마 두 박스. 현재 이 고구마는 이씨에게 돌려보내진 상태다. /노원경찰서 제공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1일 이씨는 강원도 원주시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는 시누이가 보내온 고구마 두 상자를 박 경사 앞으로 보냈다. 고구마 값은 시가로 4만5000원이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농수산물은 10만원까지 선물할 수 있다. 그러나 박 경사는 고구마는 돌려보내고 마음만 받기로 했다.
박 경사는 "민원인에게 어떤 물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경찰서 내 원칙"이라면서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닌데 할머니께서 많이 고마워하셔서 부끄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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