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떠나는 날엔] [22] 또 다른 기다림을 위한 고행

조선일보
  • 정동환 배우
    입력 2018.10.12 03:00

    정동환

    정동환 배우
    정동환 배우
    1990년 이맘때였다. 스산한 날씨의 아일랜드 더블린 '프로젝트 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던 때가.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고향에서 그의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지 관객 앞에서 선보였다.

    공연 10분여가 지났을 즈음 넥타이 끝으로 땀방울이 맺혔다. 연출가 임영웅 선생의 완벽주의는 내가 맡은 블라디미르를 편하게 두지 않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 많은 대사량에 맞춰 시선, 동선, 감정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뚝뚝…. 검은 무대 바닥 위로 물방울이 번졌다. 1막이 내렸다. 40대 초반이었지만 기력은 이미 소진된 듯싶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무대에 올라야 한다. 여분의 옷도 없어 안팎으로 다 젖은 의상을 벗어 선풍기에 널었다. 축축함이 가시지 않은 옷을 입고 다시 무대로 뛰어나갔다.

    3년 전이다. 산울림 소극장 45주년 기념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위해 다시 대본을 잡았다. 연극이란 게 우리 인생 같아서 극한의 고통을 겪고 스스로를 괴롭혀야 무언가 얻어진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예순 넘어 맡은 블라디미르 역할이 쉬울 리 없다. 아니, 그래도 된다고, 무진장 힘든 표를 내도 된다고 생각했다. 환갑 이후 히말라야에 네 번이나 다녀왔다지만 숫자가 말해주듯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까.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박상훈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니, 그게 인간이라고.' 블라디미르의 대사가 갑자기 생각난 건 최근이다. 일본 야쿠시마섬 10시간 트레킹을 하고 나서다. 삼나무 숲 속은 약간의 물기만 있어도 다치기 십상이다. 문제가 있어도 구조가 어렵다 했다. 그때 깨달았다. 힘이 들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나이 듦을 당연시하고, 나이 든 척할 필요 없는 거였구나. 나는 아마 이제야 블라디미르를 연기할 나이가 된 건 아닐까.

    지금 가장 뜨겁게 살고자 하는 건 내가 사라졌을 때 정말 깨끗하게 가고 싶어서다. 부처님의 마지막, '대반열반(大般涅槃)'이란 말이 무언가 그토록 궁금했는데 몸과 마음에 가진 것 일체 없이 가버리는 것이다. 감히 그런 경지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죄송하지만, 지금은 내게 못다 했던 인생의 빚을 갚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지성인인 척했지만 이제야 나를 자각하고, 모자람을 깨치는 중이다. 미련 없이 가기 위한 길은 또 다른 기다림을 위한 고행이라는 것을. 블라디미르를 빌리자면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건 고도가 오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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