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 대신 풍선 쓰자" 고양 저유소 화재가 바꿔 놓은 풍경

입력 2018.10.11 11:13 | 수정 2018.10.11 11:47

축제 때 풍등 띄워 온 국내 지자체 잇단 취소
1만5000여개 풍등 띄운 폴란드 축제도 행사 중지
영국 풍등 규제 도입, 미국 29개 주(州)에서는 불법

폴란드 포즈난에선 1년 중 밤이 가장 짧은 하지(夏至)에 매년 ‘노츠 쿠파위(Noc Kupały)’라는 축제를 연다. 시민들이 바르타 강 주변에 모여 하늘을 향해 1만5000개에 달하는 풍등을 날리는 행사가 유명하다. 이 축제는 부인이 집을 떠난 남편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풍등을 날린 것에서 유래했다. 소원을 적은 풍등이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관은 디즈니 만화영화 ‘라푼젤’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2015년부터 이 노츠 쿠파위 축제에서 풍등 행사가 중단됐다. 대신 퍼레이드 등 일반적인 프로그램으로 축제를 구성했다. 주한 폴란드 대사관 관계자는 "풍등을 날리면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행사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2013년 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린 노츠 쿠파위 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풍등을 날려 보내고 있다. 2015년부터 풍등 행사는 중단됐다./ 노츠 쿠파위 페이스북
◇소원성취·축제 상징 '풍등' 행사 잇따라 취소
종이나 비닐로 만든 등 모양에 소형 램프를 부착해 하늘로 날리는 ‘풍등’은 ‘소원등’으로도 불린다. 중국에서 기원한 풍습으로,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일대에도 소원을 적어 풍등을 날리는 풍습이 퍼져있다. 한국에서도 영남 지역에서 동짓날 저녁에 등싸움을 하면서 풍등을 만들어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밤 하늘을 수놓는 풍등은 소원 성취 상징으로, 전국 지자체의 각종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43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고양 저유소 화재’를 계기로 전국 곳곳의 축제에서 풍등 띄우기 행사가 잇따라 취소되고 있다. 전북 진안군은 오는 18일에 열리는 ‘2018 진안 홍삼축제’에 풍등 띄우기 행사를 취소했다.

진안군 관계자는 "고양 저유소 화재도 있지만, 작년 축제 때도 참가자가 날린 풍등이 마이산 주변 나무에 옮겨 붙었다"면서 "화재 위험이 큰 만큼 축제에서 풍등 띄우기 부분은 빼고 풍선으로 대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오전 경기 고양시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저유소에서 풍등이 원인이 된 화재가 발생해 소방대원들이 진압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강원 평창군 봉평면 ‘효석 문화제’도 내년부터는 풍등을 날리지 않기로 했다. 떨어진 풍등을 일일이 수거해야 하는 ‘환경 문제’로 폐지를 고민하던 차에 고양 저유소 화재가 터져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 무주군 반딧불 축제는 내년부터 풍등 개수를 줄이고, 재질도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오는 13∼14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메밀체험관에서 개최될 예정인 ‘2018 제주 메밀축제’에서는 ‘풍등 만들기 체험’이 취소됐다. 저유소 화재가 풍등 행사를 없애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축제 관계자는 "불 붙여 풍등을 날리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만들기 체험이지만, 누군가 풍등을 날려 화재로 이어질 우려가 있지 않겠느냐"며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에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영국 사회문제로 떠오른 ‘풍등 화재’
해외에서도 풍등으로 인한 화재는 골칫거리다.

2013년 6월 30일 밤 11시쯤(현지 시각)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주 스메드위크의 한 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에 풍등이 낙하했다. 내부에 불씨가 그대로 남아있던 상태였다. 이 불은 플라스틱 더미로 옮겨 붙었고 공장 전체가 불탔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연기가 상공 1.8㎞까지 치솟았다. 3.2㎞ 떨어진 곳에서 화재를 목격한 잭 아왈은 "큰 폭발음을 듣자 마자 밖으로 나갔다. 불길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몇 초마다 큰 소리와 함께 폭발이 계속됐다"고 BBC에 전했다.

2013년 6월 30일 밤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주 스메드위크에서 발생한 ‘풍등 화재’를 소방관들이 진압하고 있다./ 영국 웨스트미들랜드 소방 당국
소방당국은 소방대원 200명과 장비 40대가 투입해 겨우 불길을 잡았다. 이 풍등 하나는
600만 파운드(약 90억원)의 재산 피해를 냈고, 영국의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화재 직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2%가 풍등 띄우기를 금지하는 데 동의했다. 반대는 28%에 불과했다. 당시 영국 자유민주당(LDP)의 팀 패런 대표는 웨스트미들랜드주의 화재를 계기로 풍등을 날리는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화재 발생 약 일년 만인 2014년 8월 풍등에 대한 규제를 도입했다. △풍등 행사 주최자는 지방 정부에 위험성 평가를 요청하고 △작물·건초 더미, 송전선 근처이거나 풍속이 초속 2.2m 이상일 경우 풍등 띄우기를 금지하는 내용 등이다.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 테스코와 파운드랜드는 풍등 판매를 중단했다.

대지가 광활한 미국에서도 풍등 화재가 문제다. 풍등 화재가 잇따라 발생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워싱턴, 메릴랜드, 오레곤, 미네소타, 테네시, 버지니아, 하와이 등 총 29개 주에서 풍등 띄우기를 아예 불법으로 못 박았다(2015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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