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스리랑카 노동자 탓인가" 고양저유소 화재 '진짜 원인' 논란

입력 2018.10.10 15:00 | 수정 2018.10.10 17:57

저유소 화재, 스리랑카인 영장청구에
외국인 노동자에 이례적인 동정 여론
"대한송유관 공사의 부실한 시스템이 더 문제"
구속영장도 결국 기각

43억원의 재산피해를 낸 경기 고양시 저유소 화재의 범인으로 스리랑카인 노동자 D(27)씨로 지목되자 동정 여론이 일고 있다. 일부러 불을 낸 의도가 없었던 실화(失火)일 뿐인데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게 타당하냐는 것이다. 심지어 "스리랑카인이 저유소의 부실한 방재시스템을 드러냈으니 감사장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외국인 노동자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건으로는 이례적인 반응이다.
대학생 김나연(24)씨는 "이번 화재는 정부와 관리업체의 안전관리 부실과 관련된 문제"라며 "안전시스템 부실 책임을 전부 ‘스리랑카인’에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 "스리랑카인에게 오히려 감사장 줘야" 동정론 확산

지난 7일 경기도 고양 저유소 CCTV의 모습. 스리랑카인 외국인 근로자가 풍등을 날리는 모습과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붙는 모습이 찍혔다. /고양경찰서 제공
지난 7일 경기도 고양 저유소 CCTV의 모습. 스리랑카인 외국인 근로자가 풍등을 날리는 모습과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붙는 모습이 찍혔다. /고양경찰서 제공
10일 오후 4시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고양 저유조 화재 용의자인 스리랑카인 D씨와 관련한 청원 글이 모두 54개 올라와 있다. 전체의 70%(38건) 정도가 "스리랑카 노동자를 풀어주라"는 온정적인 성격의 게시물이다. "엄벌에 처하라"는 의견은 30%(16건)였다.

"스리랑카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마라"는 청원은 2600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원인은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라며 "돈 벌고 일하기 위해 들어온 평범한 우리 이웃 노동자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경찰에 따르면 스리랑카 국적의 D씨는 2015년 5월 비전문 취업(E-9) 비자로 입국했다. 합법적인 외국인 근로자로, 화재사고 당시에는 저유소 부근의 터널 공사현장에 투입된 상태였다. 그는 발파 작업 이후 깨진 바위조각을 바깥으로 빼내는 일을 하면서 한 달에 300만원 안팎을 버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화재발생 전날인 지난 6일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날린 풍등이 공사장에 떨어지자, 이것을 주워 불을 피워 날린 것으로 조사됐다. D씨는 경찰조사에서 "풍등을 보고 순간 호기심이 일어서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며 "저유소로 날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D씨가 풍등이 떨어진 장소가 저유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중(重)실화 혐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날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은 ‘연관성 입증’이 부족하다며 경찰이 신청한 D씨에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에 따라 D씨는 긴급체포된 지 48시간 만에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경찰은 향후 D씨에 대해 출국금지 한 뒤, 불구속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9일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은 10일 기각됐고, 검찰은 이날 오후 "스리랑카인 구속 영장을 청구하지 않겠다"며 그를 석방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된 스리랑카인 선처 요구 게시물. 오후 4시 기준 2602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된 스리랑카인 선처 요구 게시물. 오후 4시 기준 2602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 캡처
인터넷에서는 "D씨에게 ‘중실화’ 혐의를 적용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보배드림에서는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을 구속하는 것이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고, MLB파크에서는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애매한 사안"이라며 "(풍등 뿐만이 아니라)다른 종류의 실화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만큼 저유소 자체에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짚어봐야 한다"는 글이 게시됐다.

여성들만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여성시대’에는 "차라리 스리랑카인에게 상을 주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이 호응을 얻었다. 저유소의 허술한 관리 실태를 고발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우연에 우연이 수없이 중첩된 실수에 벌금 부과는 하더라도 구속영장은 지나치다"고 썼다.

◇"스리랑카인 마녀사냥…안전관리 책임 물어야"
경찰은 D씨가 날린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붙었고, 이로 인한 불씨가 유류환기구 쪽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송유관공사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18분 동안 화재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화재 당시 폐쇄회로(CC)TV가 45대나 설치돼 있는데도 모니터링 전담 인력이 없었다. 또 풍등이 저유소에 내려 앉거나, 불씨가 유류환기구로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힌다.

10일 오후 경찰 유치장에서 48시간 만에 풀려난 스리랑카인 D씨가 “고맙다'면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 /고성민 기자
10일 오후 경찰 유치장에서 48시간 만에 풀려난 스리랑카인 D씨가 “고맙다"면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 /고성민 기자
스리랑카인 D씨가 아닌, 대한송유관공사 측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정유업계 관계자 김모(34)씨는 "풍등만으로 이렇게 큰 불이 났다면, 다른 원인이라면 더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라면서 "스리랑카 노동자 하나를 ‘마녀사냥’ 하기보다는 안전시스템 전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연기가 피어 오를 당시 당직자들의 근무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사할 계획이다. 장종익 고양경찰서 형사과장은 "저유소 내부 온도가 800도 이상 올라가면 사무실에 알람이 울리지만 탱크 외부에는 (화재를 파악할 수 있는) 센서가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