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증인 채택도 출연금 규모로?

입력 2018.10.09 03:13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지난 1일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5대 그룹에는 국회발(發) 공문이 한 장 도착했다. 곧 열리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삼성·SK·LG는 CEO급 증인이, 현대차와 롯데는 전무급 증인이 출석할 것'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왜 이런 재벌 간 차별 조항이 달렸을까?

농해수위에서 기업인을 증인으로 채택한 것은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문제 때문이다. 2015년 11월 한·중 FTA(자유무역협정)가 국회 비준될 당시 여·야·정(與·野·政)은 농어민 피해 복구를 돕는다면서 매년 1000억원씩 10년간 1조원 규모의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재원은 FTA로 혜택을 보는 기업에서 출연받되 부족하면 정부가 충당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총 377억원만 모였다.

이마저도 한·중 FTA 와 연관성이 크다고 보기 어려운 한전과 한전 자회사 등 공기업이 대부분 출연했고 대기업은 현대차 4억원과 롯데 2억원이 전부였다. 이번 증인 채택 차별은 조금이라도 낸 기업은 전무급이, 한 푼도 안 낸 기업은 CEO가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기금 출연에 소극적일까. 가장 큰 이유는 FTA로 어떤 기업이 어느 정도 수혜가 있는지 같은 기금 출연의 법적 근거와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기업으로서는 법적 근거 없이 출연하면 배임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작년 3월 국정 농단 특별검사팀은 일부 대기업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을 뇌물로 기소했고,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재계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좋은 취지로 기금 출연을 요청해도 근거가 없으면 예전처럼 보험금 성격으로 출연금을 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담당하는 대중소기업농어촌협력재단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해 기업에 공식 회의나 공문 등을 통한 기금 출연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는 기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기업 CEO를 증인으로 불러내고 있다. 이런 증인 채택은 사실상 기금 출연 압박인 동시에 '국회 갑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차라리 기금을 낼 기준을 만드는 게 국회의 본업 아닌가. 이래 놓고 근거도 없이 눈치껏 출연하면 나중에 "왜 권력에 뇌물성 자금을 냈냐"고 추궁할 곳도 국회일 것이다.

곧 국감 시즌이다. 정부가 맡은 나라 살림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국정감사인데, 애꿎은 '기업인 국감'이 수년째 되고 있다. 국감에서 진땀을 흘리는 건 공무원이 아니라 기업인이란 말까지 나온다. 물론 기업도 국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난번 19대 국감에 나온 전체 증인 가운데 기업인 비율이 40%를 넘었다.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