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라디오 땜질하는 이분, 한국 반도체의 뿌리입니다

조선일보
  • 박돈규 기자
    입력 2018.10.06 03:00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문익점의 목화씨처럼, 반도체라는 황금 거위를 한국에 이식한 강기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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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리노에서 만난 ‘한국 반도체의 전설’ 강기동 박사는 “내가 고국으로 몰래 가져가 심은 반도체 원천 기술이 큰 나무로 자라 무수한 잎을 달고 열매를 맺은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앞에 보이는 장비는 콜린스 진공관 라디오(왼쪽)와 스피커. 그는 “진공관 라디오를 고치면서 수집하는 취미가 생겼다”며 “이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리노=박돈규 기자
    한국 반도체 신화의 전설은 고장 난 라디오를 수리하며 살고 있었다.

    지난달 12일(현지 시각) 미국 네바다주(州) 리노 외곽의 주택가. 강기동(84) 박사의 작업대는 방금 납땜이라도 한 듯 어지러웠다. 복잡한 전기회로와 손때 묻은 전기인두, 진공관이 보였다. "평생 나를 먹여 살린 건 반도체가 아니라 이 물건"이라며 그가 전기인두를 가리켰다. 진공관 시대에는 전기인두로 전자 부품들을 납땜해 연결하고 조립했다. 반도체 등장 이후에는 부품이 작아져 극소수 손재주꾼만 이런 작업을 한다.

    강 박사는 삼성반도체 초대 사장이었다.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토롤라에서 반도체를 만들던 그는 1974년 1월 경기 부천에 한국반도체주식회사(자본금 100만달러)를 창업했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KS-5001·손목시계용 칩)는 이듬해 9월 이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영광은 짧았다. 중동 전쟁으로 유류 파동이 덮쳤고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부도. 이 회사를 삼성이 인수했다. 삼성이 발행한 '삼성반도체통신 10년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성공한 삶은 아니지요. 다 잃고 떠났으니 회한과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그래도 내 원천 기술이 한국 반도체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도체를 크게 일군 삼성에도 고마운 일이고요."

    강 박사는 '한국 반도체의 아버지'다. 현대반도체(현재 SK하이닉스)도 그의 자문으로 시작되었다. 강 박사가 오는 20일 '강기동과 한국 반도체'(아모르문디 刊)라는 자서전을 펴낸다. 반도체 사업을 궁리했던 한화, 쌍용 같은 대기업은 물론 '큰손' 장영자도 등장한다. 11월 3일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여는 그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세상을 떠돈 오해와 왜곡을 바로잡고 싶었다"고 했다.

    납땜과 무선통신에 빠진 소년

    그는 일제강점기 함흥에서 태어났다. 광복 직후, 대구에서 서울로 전학 와 경기중에 다닐 때 '하이테크'와 만났다. 축음기와 광석 라디오를 본 다음부터 하교길이 달라졌다고 한다. 청계천 3가와 4가에 있는 전기 고물상을 훑었다. 전기인두를 사서 납땜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입구 같았겠군요.

    "돌아보면 그걸로 먹고산 셈이에요. 요즘도 라디오 고쳐달라는 의뢰를 받고 납땜질을 해요. 생업입니다. 인터넷으로 진공관 앰프 만드는 법을 지도하기도 하고요."

    ―6·25전쟁 때 서울에 남았는데 어쩌다 전기가 들어오는 날엔 라디오 켜놓고 김일성 장군 노래를 연습했다고요?

    "의용군에 잡혀갈까 두려운 나날이었으니까요. 밖에 들리게 크게 부르라고 어머니가 시키셨어요. '김일성 장군'으로 끝나는데 '김일똥 장군'으로 불렀죠(웃음). 암울한 시기일수록 유머가 필요해요."

    ―햄(HAM·무선통신을 이용해 동호인들이 통신을 즐기는 취미)은 어떻게 접했나요.

    "친구 집에 갔다가 일본어 책 '무선 이론'을 얻었어요. 그게 일생의 길잡이가 되었지요. 거듭 읽다 보니 진공관 회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몰두할 대상이 생긴 거로군요.

    "쉽게 말해 '불치병'에 걸린 거예요. 뭔가에 미치면 그것만 보이잖아요. 햄 아지트에서 시간 보내다 나오면 꿈에서 깨어나 피란살이 현실로 돌아오곤 했어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고요?

    "교수진에 실망했으니까요. 아마추어 무선국 만든다고 뛰어다녔어요. 'CQ(안녕) CQ, 고찌와라(여기는) HBC'라며 일본까지 불법 전파 송신에 성공한 직후엔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끌려갔습니다."

    ―대(對)간첩 작전 지휘본부 아닙니까.

    "당시 남파 간첩들은 전부 단파 장비로 활동했어요. 붙잡혔는데 거물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협력을 요청했지요. 간첩 잡으려면 전파를 내고 교신도 해야 정체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저로선 든든한 '빽'이 생긴 거예요. 1955년 마침내 아마추어 무선연맹(KARL)을 창립했지요."

    ―미국 유학 떠난 게 1958년이군요.

    "아버지가 저수지와 제방을 쌓아 국가에 공헌하신 분이에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전기 기술을 배워 가난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지요."

    ―오늘 오하이오 주립대 티셔츠를 입고 계시네요.

    “유학 시절 궁핍했어요. 전기과에서 조교직을 구했지요. 학부생 시험 채점을 하며 부족한 공부를 따라잡았습니다. 실습도 도왔는데 진공관과 전기인두를 꿰뚫고 있으니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칭찬해줬어요. 큰 자신감을 얻었지요. 반도체연구소를 만들 때 제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한국행 프로젝트, 삼성에 ‘항복’하다

    박사학위를 받곤 연구소가 아닌 생산 공장(모토롤라)을 택했다. 그는 일찍부터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흥미가 있었다. 최신 장비를 갖추고 진동과 불순물 문제를 해결하며 생산성을 끌어올렸다.

    ―당시 지휘한 부서 이름이 ‘표면 연구소(Surface Studies)’라고요?

    “표면 연구는 원래 해군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해상을 파악하는 걸 가리켜요. 당시 제 보스가 ‘반도체는 표면에서 작동하는 장치가 될 것이며 모든 문제는 표면에서 온다’고 전망했는데 적중했습니다. 반도체 칩에 적용되는 회로의 폭이 있잖아요. 기술 혁신으로 그게 무한히 작아지고 있지요.”

    ―모토롤라의 기업 분위기는 어땠나요.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랄까요. 도로며 사고는 회사가 관리할 테니 너희는 실력껏 차를 몰고 더 빨리 달리라고 격려했어요. 그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실리콘밸리를 만들었지요. 우리 교육도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라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두 일정한 속도로 달리게 하면 일등도 꼴찌도 없을 테니까요.”

    ―모토로라가 저임금 지역으로 조립 시설을 이전할 때 한국 진출을 모색한 적이 있지요?

    “1960년대 말 한국은 전자공업 자체가 황무지였어요. 반도체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기업인이 없었으니까. 제가 ‘반도체 공업 육성이 조립 사업 중심으로 잘못돼 있다’고 지적하면 한국 현실에 적응 못하는 독불장군으로 몰리는 식이었지요. 답답했습니다. ‘하이테크 사기꾼’ 소리까지 들었어요.”

    ―한국반도체주식회사 구상은 어디서 시작되었나요.

    “반도체는 타이밍이 중요해요. 점심 먹을 때와 저녁 먹을 때 듣는 정보가 달랐어요. 초조했지요. 한국 반도체의 역사는 1972년 실리콘밸리의 작은 모텔 탁자에서 시작되었어요. 제가 기술과 생산을 맡고 (KARL을 만들 때 만난) 김규한씨가 투자하기로 했지요. KARL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한국 프로젝트도 없었고 ‘한강의 기적’도 다른 모습이었을 거예요.”

    ―한국반도체는 1975년 전력 소모가 아주 적은 손목시계용 칩을 생산했지만 곧 위기에 빠졌습니다.

    “유류 파동이 길어지며 비용이 크게 늘어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어요. 삼성이 인수 작전을 벌였고 결국 부도가 났지요. 내가 남는다는 조건으로 ‘항복 문서’를 쓰고 팔렸습니다. ‘강기동은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곧 퍼졌고요.”

    ―당시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이사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사장으로 3년 있었는데 두 분과 이야기해본 적이 없어요. 측근들이 방해했고 제가 방치한 측면도 있지요. 시계 칩 양산에 성공하고 회사가 잘 돌아가자 역설적으로 강기동은 제거된 겁니다. 제가 만든 웨이퍼 생산 공장은 흑백 TV용 트랜지스터나 집적회로를 만드는 곳으로 전락했지요.”

    ―떠나올 때 허망했겠군요.

    “나를 믿어준 사람들, 힘든 시절 함께하고도 버려진 직원들에게 아직도 미안해요. 삼성을 원망했지만 먹고살기 급급했어요. 분을 삭이며 생각에서 지웠지요. 한국행에 반대한 아내와는 ‘이제부턴 한국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살아보자’ 약속했어요. 처음에는 진공관 군용 장비를 수리하며 가족 생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반도체 회사에 재취업할 순 없었나요?

    “제가 한국에 이식한 반도체 기술은 당시 군사기밀로 분류되었습니다. 법적 하자 없이 일을 진행했어도 기술 유출 혐의로 잡혀갈지 모를 일이었어요. 위험을 무릅썼지만 결국 전부 잃고 돌아온 셈입니다.”

    1970년대 중반 한국반도체(삼성반도체의 전신) 직원들이 웨이퍼 검사(wafer inspection)를 하는 장면. /강기동 제공
    삼성 반도체 1등 공신은 현대?

    남은 재주라곤 피란 시절에 익힌 땜질밖에 없었다. 고주파 전원장치를 만들어 특허도 냈다. 아내와 둘이서 사장과 부사장만 있는 벤처회사를 꾸렸다. 미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용 파워 서플라이(전력공급장치)도 개발했다.

    ―강 박사님을 찾는 한국 기업이 많았지요.

    “1982년 현대에서 반도체를 하기로 결심했으니 사업 계획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쌍용·코오롱·한화를 비롯해 한국에서 받은 반도체 사업 의뢰만 일곱 번째였지요. 자체 기술도 없고 큰돈이 들고 국내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렵다고 저는 말렸어요. 그래도 승부를 걸어야 한다면 메모리 반도체밖에 없다고 했지요.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은 대단했습니다. 미국으로 저를 찾아왔어요. ”

    ―뭐라고 했나요?

    “저를 사장으로 내정한 듯이 ‘반도체 사업의 전권을 주겠다’고 했어요. 미국에도 공장 지을 테니 한국에 들어올 필요도 없다 했지요. 현대가 덩치 큰 분야만 잘하지 작은 정밀공업은 못할 거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했고, 전자 분야에서 선발 업체인 삼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어요.”

    ―왜 사장을 맡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내가 현대전자 사장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 회장에게 여러 곳에서 압력이 들어왔대요. 마음이 식었지요. 집 전화번호를 아예 바꿔버렸어요. 결국 정 회장이 직접 현대전자 사장으로 나섰지요. 그러자 삼성도 급해졌어요. 저는 확신합니다.”

    ―무엇을요?

    “정 회장이 그렇게 뛰어들지 않았다면 삼성반도체는 시시한 수준으로 끝났을 거예요. 현대라는 경쟁자가 있었기에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비료 공장 같은 사고방식을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현대가 장군을 외치자 삼성도 1983년 초대형 신규 사업(메모리 반도체)을 발표하며 멍군을 불렀지요.

    “이병철 회장의 용단에 저도 감탄했어요. 재벌 총수들의 독점욕과 경쟁 심리가 보이지요? 네가 100원 투자하면 난 200원 쓴다는 식으로 싸움판이 커진 겁니다. 삼성은 그해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요. 삼성과 현대가 사운을 걸고 전력투구했기에 한국 메모리 반도체 신화가 완성된 거예요.”

    ―공학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면.

    “나처럼 되지 마라(웃음). 직장에선 테크놀로지가 전부가 아니고, 적과 동지를 파악해라.”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 행운과 불운이 있기 마련입니다. 돌아보면 자랑거리와 후회가 섞여 있겠지요.

    “가장 잘한 일은 납땜을 배운 거예요. 종교에 미치면 경전을 외우듯이, 10대 시절 4년간 이것만 들여다보았더니 평생을 써먹네요. 후회요? 한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인생이 덜컹거리는 일도 없었겠지요.”

    ―반도체는 사실상 한국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입니다. 반도체의 전설로서 당부가 있다면.

    “중국과 치러야 할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생산 시설을 계속 확장하고 공급 물량을 수요 이상으로 유지해야지요. 공급이 수요를 능가하는 한 소비자는 계속 1등 제품을 선택할 겁니다.”

    강 박사는 한국 정부를 향해 “고속도로에서는 크고 작은 사고가 매일 일어나지만 고속도로를 폐쇄하자는 사람은 없다”며 “공해 없고 안전하고 경제적인 원자력발전을 대안 없이 왜 줄이려 하느냐”고 물었다. 원자력 잠수함 승조원들은 원자로 옆에서 하루 24시간 먹고 자고 생활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책장에 볼룸댄스 트로피가 보였다. 그는 “60세 되던 해부터 아내와 볼룸댄스를 배웠고 열심히 스텝을 밟아 대회에서 우승했다”며 “은퇴하면 춤 선생으로 살아볼까도 생각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아내는 지난봄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진공관에 파묻혀 사는 독거 노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문익점의 목화씨만 기록할 게 아니라 강기동의 반도체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자부심을 가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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