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ESSAY] 폐지 수거 할머니의 특별한 추석 선물

조선일보
  •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입력 2018.10.05 03:10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추석 명절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귀하고 값진 선물이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날름 받아야 할지, 다시 돌려 드려야 할지, 죄송한 마음만 들었다. 허리가 활처럼 휜 팔순의 할머니가 힘겹게 4층 계단을 올라와 주고 가신 것은 달걀 한 판이었다.

    "이 집 아저씨한테 너무 고마워서요." 달걀을 아내에게 건네주면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아니, 뭘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할머니나 드시지요." 아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받지 않으려고 하자, 할머니께서는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라 죄송하지만 그냥 받아주세요. 이 집 아저씨는 신문지며, 헌책이며, 꼭 저를 위해 모아두셨다가 내주시는 분이거든요. 어찌나 고마운지, 보답할 게 마땅치 않아서…"

    할머니는 오히려 자신이 들고 온 선물이 보잘것없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문 앞에서 아내와 할머니가 주고받는 소리를 듣다가 내가 내다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깜짝 놀라시면서 "아이고, 아저씨도 집에 계셨네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사실 고마운 것은 나였다. 내 집에서 나오는 각종 폐품을 쓰레기 치워주듯이 가져가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 건물에 아들 내외도 함께 사니 우리 집에서 나오는 택배 상자도 많고, 신문도 지방지와 중앙지 2부나 구독하니 다른 집보다 폐지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게다가 헌책도 바깥에 그냥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할머니가 가져가시기 편리하게 1층 현관문 안쪽에 가지런히 놔드렸다.

    할머니가 내게 특별히 고맙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니다. 폐지를 바깥에 버리면 자칫 비를 맞을 수 있고, 차량으로 순식간에 수거해 가는 또 다른 사람도 있어 할머니가 꼭 가져가시도록 출입문 안쪽에 모아 드린 것뿐이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허리가 휘어 무거운 폐지를 들고 계단을 통해 나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마주칠 때마다 거들어 드리려고 하면 극구 마다하신다.

    나는 할머니를 뵐 때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가 절로 나온다. 종이 상자도 건물 안에 오래 놔두면 곰팡내가 나는데, 곧바로 치워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심지어 빈 쌀부대에서 나오는 몇 톨의 쌀도 주워 가시고, 빈 고구마 상자에서 나오는 흙가루까지 말끔히 닦아주신다. 그러니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나다.

    그러나 죄송한 일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내가 먼저 선물을 준비해 할머니께 드렸어야 하는데, 나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고물상에 폐지를 갖다주고 할머니가 받는 돈이 얼마인데, 이런 귀한 선물을 사오신단 말인가. 손자에게 용돈 주셔야 할 귀한 돈을 어찌 이렇게 쓰신단 말인가.

    몇 천금의 돈보다, 그 어떤 값비싼 고가의 선물 세트보다 나를 감동시킨 할머니의 추석 선물.

    이 세상 모든 풍파와 산전수전 다 겪으신 할머니. 폐지 수거라는 궂은일을 하시면서도 항상 단정한 옷매무새에 살짝 입술 화장까지 하시고, 연치가 나보다 훨씬 높으신데도 늘 먼저 인사하신다. 어른으로서의 예의와 기품을 늘 잃지 않고 당당해 보이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그러고 보면 나의 느슨한 의식과 세상을 살펴보는 안목의 부족함을 일깨워 주신 스승이다.

    나도 뒤늦게 작은 선물 하나 준비했다. 그러고는 바깥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내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보이질 않았다. 소리 안 나게 살그머니 다녀가시니 좀처럼 뵙기 어렵다. 식탁에 올라온 달걀프라이를 먹으면서도 할머니 생각에 잠긴다. 고마움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추석 명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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