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7] 겉흙 아래 숨어 있던 '초대형 묘역'

조선일보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2018.10.03 03:10

    동검, 덕천리 1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검, 덕천리 1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1992년 10월 20일, 유장근 경남대박물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은 경남 창원 동면 덕천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 건설 예정이던 육군종합정비창 터에서 지석묘(支石墓)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추수를 끝낸 논밭엔 지석묘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5기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1호묘라 이름 붙인 것만 홀로 떨어져 있었다.

    11월 1일, 이상길 연구원이 책임 조사원으로 부임하면서 발굴에 속도가 붙었다. 1호묘에 대한 본격적 조사에 앞서 주변을 정리하던 조사원들이 석렬(石列)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예상과 달리 남북으로 62.3m, 동서로 21m나 이어진 정연한 석축이었다.

    이어 큼지막한 상석(上石)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뒤 내부 조사를 진행했다. 주검이 안치되었을 석곽의 바닥은 지하 4m 지점에 있었다. 국내 선사시대 무덤 가운데 가장 깊은 것으로 기록됐다. 중요 유물 발견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이미 도굴된 뒤라 돌화살촉과 대롱옥[管玉] 일부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연구원은 토층 및 유물 출토 양상 등을 근거로 석축이 1호묘의 묘역 시설이라 주장했지만 학계에선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화재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한 위원이 '조선시대 건물지와 중복된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며 핀잔을 준 일은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고심 끝에 이 연구원은 발굴 구역 전체의 겉흙을 제거하기로 했다. 지석묘를 발굴할 때 상석 주변만 조사하고 마무리하는 종전 방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1호묘의 거대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무덤들이 속속 확인돼 23기로 늘어났다. 16호묘에서는 석검과 함께 동검이 출토됐다.

    덕천리에서 이룬 새로운 발견이 기폭제가 되어 그 후 영남 곳곳에서 초대형 묘역을 갖춘 지석묘 발굴이 이어졌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지석묘란 세상을 뜬 권력자의 무덤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의(祭儀) 공간이자 기념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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