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 스토리] ‘프랑스 샹송의 전설’ 샤를 아즈나부르, 94세 일기로 별세

입력 2018.10.02 14:25 | 수정 2018.10.02 14:45

"진정한 프랑스인이자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뿌리를 놓지 않았던 세계적 명성의 샤를 아즈나부르는 3세대에 걸쳐 우리와 기쁨, 아픔을 함께 해왔다. 그가 남긴 걸작들과 목소리, 그만이 가졌던 빛은 그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프랑스 샹송의 전설’ 샤를 아즈나부르가 지난 1일(현지 시각)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에이전시는 아즈나부르가 노환으로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아즈나부르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일 트위터를 통해 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샤를 아즈나부르가 1988년 9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 위키미디어
대표작 ‘라 보엠(La Bohème)’과 ‘라 맘마(La Mamma)’ ‘쉬(She)’로 우리에게 친숙한 아즈나부르는 평생 13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으며, 프랑스어·영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독일어 등 8개 언어로 노래했다. 데뷔 후 70여년 간 청명한 고음과 웅장한 저음을 동시에 내는 독특한 테너 목소리로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 94개국에서 공연, 1억8000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가수보다 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양철북’ ‘피아니스트를 쏴라’ 등 60여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메니아인으로서 2009년에는 스위스 주재 아르메니아 대사에 임명돼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아즈나부르는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활발한 투어 활동을 이어갔으며, 지난달 19일 일본 오사카 NHK홀에서 열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다.

◇ 부모님 식당서 노래하던 9살 소년…프랑스 대표 싱어송라이터로

아즈나부르의 본명은 샤흐누르 바게나그 아즈나부리안이다. 1924년 프랑스 파리 생 제르망 드프레에서 아르메니아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가수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9살 때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식당에서 공연을 시작했으며, 영화 ‘라 게르 데 고스(La Guerre des Gosses)’ 출연을 계기로 배우로서의 삶도 피어났다. 아즈나부르라는 예명을 쓴 것도 이 때부터다.

아즈나부르는 뮤지컬 단체의 일원으로 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전문 무용수로서도 매일 밤 클럽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4년 음악 감독이자 가수인 피에르 로슈와 함께 작곡을 시작했으며, 1948년 데뷔 싱글 ‘부아예 세 르 프렝탕(Voyez, C’est Le Printemps)’을 발표했다.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쥘리에트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등 프랑스 가수들에게 곡을 써주며 작곡가로도 인지도를 쌓았다.

1946년 아즈나부르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 인연을 맺은 피아프는 그를 프랑스와 미국 투어에 동행시켰으며, 작곡을 함께 해온 로슈와 아즈나부르가 각자의 길을 걷고나서부터는 그가 솔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아즈나부르는 특히 피아프의 오프닝 무대를 서며 오늘날 ‘아즈나부르 목소리’로 알려진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즈나부르와 피아프는 아즈나부르가 첫번째 부인인 미셀린 루겔과 이혼한 뒤,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나 결국 결혼까지 이르지 못하고 헤어졌다.

샤를 아즈나부르(맨 오른쪽)와 에디트 피아프(왼쪽에서 두번째). / 샤를 아즈나부르 홈페이지
이후 아즈나부르는 카바레 클럽을 전전하며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1954년 물랑 루즈, 다음 해에는 프랑스 가수들의 로망인 올랭삐아 무대에 진출하면서 샹송 가수로 거듭났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영화배우로서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게 됐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내놓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라 보엠(La Bohème)’ ‘라 맘마(La Mamma)’ 등이 당시 발표된 그의 대표곡들이다. 아즈나부르는 이 시기 미국 뉴욕 카네기홀(1964년), 런던 애버트홀(1967년) 등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는 말론 브란도 등 미국의 인기 배우들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다.

1974년에는 영국 작곡가 허버트 크레츠머와 작곡한 ‘쉬(She)’가 대성공을 거뒀다. 쉬는 그해 14주 연속 영국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 곡은 1999년 영화 ‘노팅힐’의 사운드트랙으로 영국 가수 엘비스 코스텔로가 리메이크하며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 ‘혈육의 나라’ 아르메니아 재건에도 적극 참여…마지막까지도 투어 준비해

1980~1990년대에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난과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회 활동가로서 활동했다. 아즈나부르는 특히 자신의 뿌리가 아르메니아에서 왔음을 잊지 않았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2만5000여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자 그는 1989년 자선싱글 ‘푸르 투아 아르메니(Pour Toi Arménie)’를 발표했고, 자선단체를 설립해 구호활동에 앞장섰다. 프랑스 대표 가수들이 참여한 푸르 투아 아르메니는 18주 연속 프랑스 싱글차트 1위를 기록했다.

유네스코는 이에 1995년 아즈나부르를 아르메니아 영구 친선 대사로 임명했다. 아르메니아 재건을 위해 설립된 아르메니아 펀드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던 아즈나부르는 자신이 모은 1억5000만달러 상당의 기금을 아르메니아에 전액 희사하며 2004년 아르메니아 정부로부터 ‘아르메니아 국가 영웅(National Hero Of Armenia)’ 칭호를 받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밖에도 아즈나부르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수도 예레반과 제2의 도시 귬리에 각각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을 세워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르메니아 귬리에 세워진 샤를 아즈나부르의 동상. / 위키미디어
아즈나부르는 여러 언어로 프랑스 샹송을 전 세계 알린 공로로 1996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Songwriters Hall Of Fame)’에도 헌액됐다. 1997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d'honneur)’을 수여받았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프랑스 최고의 훈장으로,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며 훈장 수훈자는 각종 국가적 행사에서 특별 예우를 받는다.

아즈나부르는 일생 동안 프랭크 시나트라, 레이 찰스, 호세 카레라스, 나나 무스쿠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과 협업하며 음악 활동에 매진했다. 최근까지는 엘튼 존, 스팅, 셀린 디온, 조쉬 그로반 등 쟁쟁한 후배 가수들과도 듀엣 음반을 내며 건재함을 드러냈다. CNN은 1998년 아즈나부르를 세기의 엔터테이너로 평가했으며, 같은 해 타임 온라인은 그가 ‘20세기의 연예인’ 100위 명단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밥 딜런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8월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그의 별이 새겨졌다.

아즈나부르는 지난 4월 투어 리허설 도중 허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투어 일정은 내년으로 미뤄졌지만, 아즈나부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면 취소됐다. 아즈나부르가 게스트로 활약하던 영국 BBC 토크쇼 ‘그라함 노튼 쇼’ 일정 역시 그가 지난 5월 팔을 다치면서 연기됐으나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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