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산해진미라면 이인상은 기름기 없는 채소"

조선일보
  • 이한수 기자
    입력 2018.10.01 03:00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펴낸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20년간 연구… 집필만 6년 걸려 "연암과 추사가 존경한 문인화가"

    18세기 화가 이인상을 연구한 박희병 서울대 교수.
    18세기 화가 이인상을 연구한 박희병 서울대 교수. /박상훈 기자
    보도블록 같은 책 두 권이다. 합쳐서 2302쪽, 무게 3.4㎏이다. 예술가 한 사람을 다룬 연구서다. 제목은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돌베개). 18세기 화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그림과 글씨를 분석한 대작(大作)이다. 박희병(62)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집필에만 6년 걸렸다"고 했다.

    박 교수는 손꼽히는 연암(박지원·1737~1805) 연구의 권위자다. 고전 문학과 사상사 관련 책을 여러 권 냈다. 이번 책으로 서화(書畵)까지 손을 뻗었다. 박 교수는 "문학, 사상사, 예술사는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번 책은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통합 인문학'을 실천한 예"라고 했다.

    이인상은 겸재(정선·1676~1759)나 단원(김홍도·1745~?)에 비하면 유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한 세대 후배인 연암과 추사(김정희·1786~1856)가 모두 존경했을 만큼 뛰어난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박 교수는 "청(淸)에 당한 남한산성의 수치를 오랫동안 기억한 18세기 전반의 문제적 지식인 집단(단호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인상"이라며, "그림과 글씨의 법도를 완전히 습득한 후 이를 뛰어넘어 예술가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구룡연도(九龍淵圖)'를 예로 들었다. 이인상이 1752년 금강산 구룡연을 그린 그림이다. 얼른 보기엔 그리다 만 그림 같다. 이인상은 화제(畵題)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몽당붓과 담묵(淡墨)으로 뼈[骨]만 그리고 살[肉]은 그리지 않았으며 색택(色澤·빛깔과 광택)을 베풀지 않았다. 감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심회(心會·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가 중요해서다.' 박 교수는 "군더더기나 부귀공명 같은 이름은 필요치 않다는 올곧은 자세를 나타낸 것"이라며 "겸재가 호방하고 활달한 필치를 보여준다면 이인상은 신념을 지키고 세상과 맞서는 비장한 미감(美感)을 준다"고 했다.

    병든 국화를 그린 이인상의 그림 ‘병국도(病菊圖·왼쪽 큰 사진)’는 원래 만년의 작품으로 간주됐지만, 박희병 교수는 이를 23세 때 작품으로 추정했다. 오른쪽 글씨 ‘야화촌주(野華邨酒·위)’는 ‘들에 핀 꽃, 농가에서 빚은 술’이란 뜻이고, ‘막빈어무식, 막천어무골(莫貧於無識, 莫賤於無骨)’은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뼈가 없는 것보다 천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병든 국화를 그린 이인상의 그림 ‘병국도(病菊圖·왼쪽 큰 사진)’는 원래 만년의 작품으로 간주됐지만, 박희병 교수는 이를 23세 때 작품으로 추정했다. 오른쪽 글씨 ‘야화촌주(野華邨酒·위)’는 ‘들에 핀 꽃, 농가에서 빚은 술’이란 뜻이고, ‘막빈어무식, 막천어무골(莫貧於無識, 莫賤於無骨)’은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뼈가 없는 것보다 천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돌베개

    '뼈'는 이인상 작품을 이해하는 핵심어다. 이인상 글씨 중 '막빈어무식(莫貧於無識), 막천어무골(莫賤於無骨)'이란 글이 있다.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뼈가 없는 것보다 천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박 교수는 "이인상은 모든 생명 존재와 인간의 정수가 뼈에 있다고 보는데, 그의 그림과 글씨에는 내면의 기골이 느껴진다"면서 "추사 글씨에는 졸(拙·기교를 부리지 않음)을 잘 구현하겠다는 교(巧·기교)가 있는 반면 이인상의 글씨에는 그런 의식도 없고 그런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도 없다"고 했다.

    이인상의 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순기(蔬筍氣)'. 채소나 죽순 같은 기운이란 뜻이다. 박 교수는 "겸재나 추사의 작품이 기름진 산해진미(山海珍味)라면 이인상의 작품은 기름기 쫙 빠진 자연 채소"라며 "동아시아로 넓혀 봐도 독자적인 미학 현상을 보여주는 예술가"라고 했다.

    책은 20년 연구의 결과물이다. 1998년 이인상 문집인 '능호집'을 번역하기 시작해 3년 후 마쳤고, 2005년 후손가에 소장된 초본(草本) 문집 '뇌상관고'를 발견하고 면밀히 검토했다. 10여년간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를 보기 위해 주요 미술관과 개인 소장자를 찾아다녔다. 문집과 실록 기록, 그림과 글씨를 넘나들면서 이인상이 작품을 언제 왜 그리고 썼는지 밝히고 그의 내면과 시대 배경을 치밀하게 고증했다.

    책에는 새로 찾아낸 그림 2점을 더해 모두 64점을 실었다. 서예 작품은 100여점을 발굴해 131점을 다뤘다. 각 권 부록에는 이인상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과 글씨를 싣고 이유를 밝혔다. 유명 미술관 소장품도 위작으로 판정했다. 박 교수는 "오랫동안 이인상 작품을 보았더니 진품 여부를 금세 알 수 있다"면서 "미술사가는 위작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나는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본 그대로 밝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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