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말 많은 패션계… 도스토옙스키 덕에 버틸 수 있었죠"

조선일보
  • 곽아람 기자
    입력 2018.09.20 03:01

    '패션MD' 3권 완간한 김정아 대표… 책과 옷에 미친 러시아 문학 박사

    흰 직사각형 명함에 '대표이사/문학박사'라고 적혀 있다. 사무실엔 마네킹과 옷 무더기가 쌓여 있지만 책장엔 도스토옙스키 작품이 빼곡히 꽂혀 있다. 김정아(49)씨는 패션계와 인문학에 각각 한발씩 담그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패션 MD다. 편집숍 스페이스 눌을 운영하며 8개 해외 브랜드를 국내에 독점 판매한다. 또한 인문학자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슬라브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문학작품을 16권 번역했다.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이지만 패션업계에선 '패션MD' 저자로 유명하다. '패션MD'(21세기북스)를 최근 총 3권으로 완간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난 대학생 때 딱 두 가지만 샀다. 책과 옷"이라며 깔깔 웃었다. "87학번이에요. 그 엄혹하던 1980년대에 하이힐 신고 짧은 치마 입고 등교하는 말도 안 되는 아이였죠."
    ‘스페이스 눌’의 ‘눌(Null)’은 러시아어로 ‘0’ 또는 ‘영원’을 뜻한다. 김정아 대표는 “아무것도 없다는 건 모든 걸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스페이스 눌’의 ‘눌(Null)’은 러시아어로 ‘0’ 또는 ‘영원’을 뜻한다. 김정아 대표는 “아무것도 없다는 건 모든 걸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대학 시간강사로 뛰던 그가 패션계에 뛰어든 건 2007년이다. 처음엔 남편 사업을 도와주는 차원이었다. '딱 3년만' 하려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0년이 지나 있었다. 2015년 첫 권을 내놓은 '패션MD' 시리즈는 패션 MD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기본기를 알려주는 책. 세 권이 각각 '바잉(buying)' '브랜드' '쇼룸'으로 구성됐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인문학적 발상에서다. "인문학이란 자기가 공부해 쌓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잖아요. 패션계는 전화번호 하나도 공유 안 해요. 처음 이 바닥 들어와서 어느 멀티숍 대표에게 '뉴욕 패션위크 땐 어디에 가야 하느냐' 물었다가 '무례하다. 그건 영업비밀이라 물어보는 게 아니다'는 말을 들었어요. 공부를 하려 해도 관련 책 한 권 없었지요."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해 세월이 흘렀다. 패션계에 탄탄히 자리 잡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몸으로 깨달은 걸 남들에게 알려줘야지!' 브랜드 조사하는 방법부터 각국 패션쇼 때 필수로 들러야 하는 곳 정보까지 꼼꼼히 정리했다. 전문가용 책이었지만 3쇄까지 찍으며 스테디셀러가 됐다. 업계 관계자들이 연락해 왔다. "이 동네선 '정보'가 밥줄인데 다 나눠주다니 아깝지 않아요?" 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음식점 레시피라면 모를까, 시간 지나면 다 알게 되는 게 어떻게 기밀이 되나요.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승부하는 건 비겁한 거라고 답했죠. 아마 업계에선 나를 미워할 거예요.(웃음)"

    패션 MD이자 인문학자, 세 아이 엄마로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산다. 밤 9시 반 잠자리에 들어 새벽 1시 반쯤 일어난다. "남들 잠든 새벽 시간이 제겐 '노는 시간'이에요. 공부가 제게는 놀이니까요. 책 읽고 글 쓰고 번역도 하지요."

    '밥벌이엔 쓸모없다'는 인문학이 그가 거칠고 말 많은 패션계에서 버티는 동력이 됐다. "저는 아이들에게 '책은 영혼과 정신의 덤벨이다'라고 얘기해요. 미친 듯 책을 많이 읽은 게 정신적 근육이 돼 줬어요. 안달복달하던 제가 긍정적이고 강한 사람으로 커져 있더라고요. 제가 인문학에서 배운 게 뭔 줄 아세요? 인생이라는 게 공짜도 없지만 열심히 한 일을 무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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