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64] 품격과 겸양의 언어

조선일보
  •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18.09.15 03:12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라틴어는 상징성을 지닌 언어다.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고 제국의 패망 후에도 유럽 사회의 학술과 외교 전반에 쓰였기 때문이다.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였던 한동일의 책 '라틴어 수업'을 읽다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법률적 표현이고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 걸 알았다. 라틴어가 '하지 마라' '주의해라' 같은 명령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인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라는 것도 말이다.

    그는 라틴어를 공부하며 상대적으로 한국어가 조금 거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연장자가 어린 사람을 쉽게 하대(下待)하는 언어 습관이나 계급에 따라 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 말이다. 그에 비해 라틴어는 수평성을 전제로 한다.

    책에 의하면 라틴어의 성적 구분 역시 그렇다. 라틴어의 성적은 모두 네 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하버드 대학에서 최우수 졸업생들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기도 한 '숨마 쿰 라우데'는 라틴어로 최우등을 의미한다. 그 밖에 마그나 쿰 라우데(우수), 쿰 라우데(우등), 베네(좋음·잘했음) 같은 표현들의 흥미로운 점은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이라는 점이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 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것이다.

    이진순의 책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에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반말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어린 사람을 하대하는 문화는 조선의 것이 아닌 일제의 잔재고, 조선의 언어는 아랫사람에게 말할 때 '무엇무엇 하게' '하시게~'라고 존대했다는 게 이유였다. 퇴계는 26세나 어린 기대승과 논쟁을 벌이면서도 반말하지 않았다. 좋은 언어 습관이 소멸한 셈이다. 누군가 여전히 라틴어를 배우는 건 그저 지적(知的)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언어가 가지고 있던 품격과 겸양을 동시에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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