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금방 딴 채소같은 신선한 소고기… 사냥 마친 전사처럼 베어 먹었다

조선일보
  •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입력 2018.09.14 03:00

    [인생식탁]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서울 삼전동 '부농정육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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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도축된 고기를 써서 양과 질이 모두 만족스러운 대표 메뉴 소모둠구이.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삼전동 탄천 옆으로 난 길에는 불이 켜진 집 찾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한 집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부농정육식당'이란 간판 아래 문을 활짝 연 집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작은 의자에 앉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불판을 바라봤다. 그러다 크게 웃으며 허리를 뒤로 쫙 펴기도 했다. 짐승을 잡은 원시 부족 마을처럼 하얀 연기가 자욱했고 사람들은 사냥을 마친 전사처럼 고기를 베어 먹었다. 나는 때를 놓친 낙오자처럼 슬그머니 그 틈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예약하신 분이죠?"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깨소금을 살짝 찍으면 맛이 더 선명해지는 등심.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중년 여자가 마치 단골손님을 대하듯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얼굴이 불콰해진 객들 사이에서 움츠렸던 어깨가 펴졌다. 그 웃음에 농으로 화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대신 빨리 주문을 넣었다. 메뉴를 공부하듯 오래 보고 있으면 낯선 객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차돌박이부터 주세요."

    "네, 바로 드릴게요."

    주문을 받으면 명세표에 줄 하나 쓱 긋고 차갑게 돌아서는 프랜차이즈 고깃집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이모' '사장님' '여기요' '저기요'를 외쳐댔다. 자기 새끼를 먹이는 어미 새처럼 그녀는 일일이 넉살 좋게 답했다.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어깨 넓은 남자는 리바운드를 하듯 그녀가 놓친 주문을 빠르게 챙겼다. 본래 정육식당이란 말에 '값이 싸니 서비스 기대 말고 알아서 먹으시오'라는 뜻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집에 들어선 지 1분도 되지 않았을 때 안심이 됐다. '이제 고기만 좋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돌박이를 기다렸다. 보통 차돌박이는 분량대로 썰어놓고 냉장고에 넣어둔다. 또 얇기 때문에 빨리 익힐 수 있다. 일단 재빨리 위벽에 기름칠부터 하고 본게임을 시작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생각과 달랐다. 주인장은 주문을 받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는 맞았다. 그러나 그녀가 꺼낸 것은 썰린 고기 조각이 아니라 큼지막한 차돌박이 덩어리였다. 허리를 굽혀 묵직한 고깃덩어리를 꺼내더니 그대로 절삭기에 올려놨다. 주저 없이 전원을 넣었다. 날카로운 쇳날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체중을 실어 고기를 밀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하얀 기름과 빨간 고기가 지층을 이룬 차돌박이 한 접시가 나왔다. 달군 불판에 올려 핏기만 가셨을 때 입에 넣었다. 돼지비계보다 더 무겁고 더 고소한 쇠기름 맛이 가득 찼다. 잡맛 하나 없이 깨끗한 기름이었다. 그때그때 고기를 썰어 놓으니 냉장고 잡내 낄 새가 없고 또 산소와 만나 고기 맛이 변할 이유도 없었다. 기름을 친 매콤한 파채를 곁들이니 여느 양식당 고급 샐러드 느낌까지 났다. '어어' 하는 사이에 고기 한판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소모둠구이'를 주문했다. 괜히 흥이 올라 "좋은 걸로 주세요"라고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 말에 주인장은 거의 본인 상체만 한 고깃덩이를 꺼냈다. 그다음 시퍼런 큰 칼을 들었다. 그녀는 채 1초도 되지 않는 틈에 고기 양을 가늠하더니 영화 킬빌의 우마 서먼처럼 그대로 고기를 썰어냈다. 코끼리 발바닥만 한 고기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

    "와, 여기 새우살이 그대로 붙었네요. 이거 다른 집에서는 비싸게 따로 파는 부위예요."

    고기 좀 먹어본 일행이 목소리를 높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하여 새우살이라고 부르는 부위는 등심의 한 부분이다. 한 마리당 극히 소량만 나오며(고급이니까 당연히) 등심보다 마블링이 더 빽빽하고 부드럽다.

    "저희 어머니께서 원래 정육점을 하셨어요. 원래는 화요일·금요일에만 소를 가져다가 작업을 했는데 이제 매일 해요. 워낙 찾는 분이 많아서요."

    아들은 고기를 써는 주인장 옆에서 한우 암소 1+ 등급만 쓴다는 말을 덧붙였다. 강남 웬만한 집 절반도 안 되는 값에 고기를 내놓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곳에 앉아 있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도축한 지 얼마 안 된 소고기는 밭에서 갓 꺼낸 채소처럼 신선한 맛을 냈다. 기름진 등심도, 쫄깃한 갈매기살도, 진득한 맛의 안창살도 옛날 정육점에서 떼어온 고기처럼 풍성했다. 몇 번 더 주문을 추가했다. 그때마다 주인장은 고향집 내려온 자식 대하듯 고기를 썰었다. 화요일·금요일에만 준다는 시뻘건 간과 천엽도, 2000원밖에 하지 않지만 온갖 고기 부속이 들어 있는 칼칼한 된장찌개도 챙겨 먹었다.

    어둑한 밤 내내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주인장 굽은 허리는 펴질 틈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 좀 쉬세요"라고 말하며 대신 주문을 받았다. 큰 칼이 시퍼런 날을 드러냈다. 또 다른 밤이, 또 다른 세월이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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