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사물극장] [63] 건축가 박길룡의 '문화 주택'

조선일보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입력 2018.09.13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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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길룡(1898~1943)은 일제강점기에 근대 한국 건축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정부 청사로 쓰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을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로 규정해 해체했다. 이때 중앙 돔 아래에서 53명의 건축가 명단을 새긴 동판(銅版)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는데, '기수(技手) 박길룡'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박길룡은 종로통에서 미곡상을 하는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서 열 살 무렵부터 쌀 배달, 물장수, 행상 등의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는 경성공업전문 건축과(지금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를 1회 졸업생으로 나와, 이듬해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들어갔다. '기수'는 사무관과 기사 아래로 하급직이었다. 그보다 12년 연하인 이상(1910~1937)도 경성고공 건축과를 마친 뒤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했다.

    박길룡은 조선총독부에 다니면서 부업으로 조선인이 맡긴 집과 사무실을 설계했다. 조선총독부에 사표를 던지고 1932년 7월 7일,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 직원 8명과 함께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박길룡 건축사무소'는 열두 해 동안 근대 건축의 새 길을 열었다. 1937년 11월, 그가 설계한 화신백화점 전관(全館)이 문을 열며 위용을 드러냈다.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된 서양 근대 건축 양식을 따른 이 첨단 건물은 장안의 화제로 연일 인파를 모았다.

    당시 다들 재래 주택을 기피하고 '양식' 집에 관심이 높았다. 박길룡은 '소비가 덜 되고 쓸모 많고 볼품이 좋은' 문화 주택을 제안했다. 외관과 구조는 환기와 채광이 좋은 서양식을 취하되 온돌과 가구는 전통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는 '실용'과 '기능'을 취하면서도 거기에 우리 것과의 조화를 더했다. 박길룡은 '건축조선'을 창간하고, '조선어 건축용어 사전' 등을 정리했다. 1943년 4월 27일 오전, 이화여전 강의 중에 뇌일혈로 쓰러져 공평동 사무실로 옮겼으나 10시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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