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서 숏컷으로 등장한 양예원씨, 탈코르셋 논쟁 재점화
숏컷→탈코르셋→페미니즘인가?
"숏컷=탈코르셋, 또 다른 획일화 아니냐" 비판도
지난 5일 성추행·누드사진 유출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한 유튜버 양예원(24)씨가 피해자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했을 때, 대중의 시선을 잡은 건 그의 짧아진 머리였다. 양씨는 주로 긴 머리 헤어 스타일을 해왔는데, 이날은 머리가 눈에 띄게 짧아진 모습이었다.
양예원 ‘숏컷’은 이날 재판 내용보다 더 주목 받았다."‘언니(여성여론)’들에게 도움 받으려고 숏컷을 했다"는 비판여론이 나오면, 반대편에서는 "외모로 여성을 평가하는 전형적 꼰대 마인드"라는 반박이 나오는 형국이다.
◇숏컷=탈코르셋?...때아닌 페미니즘 '탈코' 논쟁
지난 6일 극우성향 여성혐오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에서는 양씨의 헤어스타일을 두고 "숏컷은 일명 '탈(脫) 코르셋 컷' 등의 비판여론이 형성됐다. 반대로 남성혐오 인터넷 커뮤니티 '워마드' 이용자들은 " 짧게 자른다고 '탈코르셋'이라고 하는 건 구시대적 발상"같은 댓글이 달렸다.
‘탈코르셋 운동’이란 벗어나자는 뜻의 '탈'(脫)과 여성 억압의 상징 '코르셋'(corset·체형 보정 속옷)을 결합한 말이다. 긴 머리, 메이크업, 하이힐 등 '꾸밈’으로 상징되는 여성 억압적 문화로부터 해방되자는 운동이다. 줄여서 ‘탈코’라는 말로도 불린다.
우리나라의 탈코르셋 운동은 지난 6월 한 여성단체가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 "현대판 코르셋에서 내 몸을 해방하라!" 등을 주장하며 강남대로에서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벌인 후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긴 머리를 '숏컷' 스타일로 짧게 자르거나 늘 해오던 화장을 지우고 쌩얼(노메이크업) 사진을 올리고는 '#탈코르셋'이라는 해시태그를 함께 다는 것.
유명 배우나 인기 유튜버(youtuber·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들의 ‘탈코르셋 선언’은 국내 탈코르셋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유튜버 '데일리 룸 우뇌'는 "화장과 긴 머리에서 벗어나 사회가 씌운 '꾸밈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탈코르셋 운동을 하려 한다"며 뷰티 영상을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다른 뷰티 유튜버 '배리나'도 탈코르셋을 지지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서 배씨는 공들여 화장을 한 후 다시 화장을 지우고 안경을 썼다. 그리고 "저는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혹사시키지 마세요. 당신은 그 존재 자체로 특별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영상은 현재 360만여 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다.
지난 6월 국내 방송사 한 아나운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알 게 뭐야(Who cares)? #두발자유"라는 글과 함께 잘린 머리카락 사진을 올렸다. 이를 두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한 것이 아니냐 등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외국에선 이미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여주인공 엠마왓슨, ‘영화 원더우먼’ 여주인공인 갤 가돗, 스칼렛 요한슨 등 유명 영화배우들이 공식 석상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후, 다양한 숏컷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다. 이후 여성계 일각에서는 ‘짧은 머리=소신 있는 여성’이라는 인식도 생겨났다.
◇'숏컷=탈코르셋' 공식은 또 다른 획일화..."역(逆)코르셋" 분석도
그러나 '숏컷=탈코르셋'이라는 공식은 '여자는 치마'라는 생각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획일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성 네티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사이트 네이트판에도 이 같은 지적을 하는 글이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지난 6월 4일 "왜 화장을 안 해야 탈코르셋이고, 어울리지도 않는 숏컷을 해야 탈코르셋이냐"라는 내용의 글을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글에는 '탈코르셋은 오히려 ‘숏컷 하고 쌩얼이어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등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탈코르셋을 역(逆)으로 강요하는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혐오 논쟁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탈코르셋을 찬양하는 쪽에선, 화장을 즐겨 하고 머리를 길게 기르는 여성을 향해 '흉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흉자는 '남성을 흉내 내는 여성'이라는 뜻을 가진 비속어다.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인기를 얻은 뷰티 유튜버 '한별'은 페미니스트답지 않다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5월 다이어트 비법 영상을 올린 한별의 계정에 네티즌들은 "페미니스트라면서 '코르셋'을 전파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의 댓글을 다수 달았다.
인터넷 상에는 숏컷으로 잘랐다가 "탈코르셋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아 힘들다는 사연도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인터넷 게시판에 '숏컷 여성분들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라는 제목으로 "긴 머리하면 원시인 같아서 단발이나 숏컷을 하는데 요새 '탈코르셋' 때문에 신경 쓰여 죽겠다"며 "숏컷이 무슨 페미니스트의 상징처럼 돼 가는 분위기인데 나까지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로 볼까 봐 짜증난다"는 글을 올렸다. 이 밖에 또 다른 네티즌은 "페미니즘은 아니지만 숏컷을 하고 다닌다"라며 "제발 저를 페미니스트냐고 물어보지도 말고 엮지도 말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 교수는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은 사회가 규정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겠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라면서도 "또 다른 규정(숏컷=탈코르셋)을 짓는 행위는 여전히 기성사회가 부여한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스러움'을 재각인시키는 '역 코르셋'을 씌우는 행위"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