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눈이 먼 장군 도안고(장두이)는 문신 조순(유순웅)을 모함해 그의 구족(九族) 300명을 멸살한다. 조씨 집안과 인연 깊은 정영(하성광)은 마흔다섯에 얻은 늦둥이를 대신 내주고 마지막 조씨 핏줄(이형훈)을 구해낸다. 이 아이를 살리려 사람들이 죽고 또 죽어간다. 단도로, 머리끈으로, 돌에 스스로 머리를 찧으면서. 이들이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이유는 단 하나, 끝내 도안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연출 고선웅)' 무대 위엔 죽음이 난무한다. 정영은 제 친아들을 조씨 고아로 여긴 도안고가 땅에 세 번 내리쳐 죽이는 걸 무력하게 지켜본다. 죽음을 겪거나 지켜보는 배우들의 말은 칼이 돼 가슴을 찌른다. 만들어진 대의와 명분에 스스로를 옭아맨 인간들에게 평안은 없다. 깊어지는 비극 속으로 소용돌이치듯 끌려들어 갈 뿐이다.

멸문당한 조씨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 조씨 고아(오른쪽). 시골 의원 정영을 통해 양아버지 도완고가 실은 가문의 원수인 것을 알게 된다.

조명과 음악은 감정을 어디까지 밀어올릴 수 있는지 시험하듯 내달린다. 애끊는 고통이 무대 위를 휘몰아치는데, 객석은 짧고 굵은 폭소로 자주 일렁인다. 이 비극을 뒤집어 보면 사실은 말도 안 되게 희극적이라는 것을, 배우들이 과장된 몸짓과 발성을 통해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에 "쥐면 펴야 하고 이화(異化)가 있어야 동화(同化)도 있다"는 고선웅 연출의 지론이 스며 있다.

격동적인 복수의 클라이맥스가 지나가고, 정영은 죽어간 이들의 환영과 만난다. 소중한 걸 다 내주고 20년을 기다려 복수에 성공했는데,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공허의 무중력 공간이 된 무대 위로 지켜본 사람의 마음이 닻줄 끊어진 배처럼 떠돌 때 정영은 관객을 향해 말한다.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원작은 사마천 사기에 나온 춘추시대 사건을 연극적으로 재구성한 중국 고전. 2015년 초연 때 대한민국 연극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듬해 중국 공연 때 "중국 대형 연극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중국 극장에서 중국 이야기로 중국 관객을 정복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공연은 10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