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밥 없는 밥심

조선일보
  • 강정미 기자
    입력 2018.09.07 03:00

    [cover story] 쌀밥 대신 면·빵·샐러드로 한끼… '밥심' 한국인의 변심
    "건강·몸매관리 위해" "다른 먹거리 많아" "시간 없고 귀찮아서"… 점점 덜 찾는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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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심이 변했다. 김 모락모락 나는 쌀밥 대신 빵, 면, 샐러드 등을 주식(主食)삼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밥심 대신 '빵심,'면심','풀심'으로 사는 한국인들에게 이제 '밥=쌀'이라는 공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여의도 샐러드 전문점 '피그인더가든'.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으러 온 주변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증권사에 근무하는 김성훈(41)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풀심' 채우러 이곳을 찾는다. "칼로리 걱정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가벼우면서도 간편해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로도 샐러드를 자주 먹어요." '밥심' 대신 풀심이라지만, 샐러드라고 풀만 먹는 건 아니다. 요즘 샐러드는 채소뿐 아니라 치킨, 연어, 달걀, 수퍼푸드 등을 더해 영양 균형을 맞춰 한 끼 식사로 대용할 만하다. 다이어트식이나 간식이라는 인식이 깨졌다. 남자들의 식사 메뉴로도 인기다.

    매장엔 '혼밥'하거나 동료와 함께 샐러드를 먹는 남성 고객들이 반을 차지했다. 김씨는 "오후 일정도 있는데 너무 배부르거나 땀 흘리며 먹는 밥보다 깔끔하면서 간편한 식사를 즐기는 동료가 많아지면서 함께 풀심 찾는 날이 많다"고 했다.

    직장인 신혜진(26)씨는 바쁜 아침이나 저녁 식사로 간편대체식을 애용한다. 플라스틱 용기에 든 분말에 물만 부어 흔들면 한 끼 식사 완성이다. 씹을 필요도 없이 후루룩 마시기만 해도 약 400㎉의 열량에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 필수 영양소와 식이섬유, 비타민까지 한 번에 챙길 수 있다. '미래형 식사'라고 불린다.

    "바쁘거나 피곤할 때 밥 먹는 게 귀찮을 때도 있는데 씹을 필요 없이 마시기만 해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분이 들어요." 올리브영에 따르면 올 1~8월 분말형 간편식, 견과류, 시리얼바 등 간편대체식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 증가했다.

    한국인의 주식(主食)이 바뀌고 있다. 김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대신 샐러드나 빵, 면, 간편식을 주식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옛말이 됐다. 밥심 대신 '빵심', '면심', '풀심'으로 사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쌀 소비량은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며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 양곡소비량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1.8㎏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1980년 쌀 소비량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69.3g. 밥 한 공기가 쌀 90g 기준이니 하루에 두 공기를 채 먹지 않는 셈이다. 20년 전인 1997년(280.6g)과 비교하면 한 공기 이상 줄었다.

    집 나간 밥심은 줄어든 밥공기 크기로도 체감된다. 행남자기에 따르면 현재의 밥공기 용량은 300cc. 1975년의 450cc에 비해 30% 이상 줄어들었다. 미국 그릇브랜드 코렐에선 2012년 한국 식생활에 맞춰 기존 450mL 대신 330mL 사이즈의 밥공기를 내놓았다. 밥 한 공기의 양에 시대의 단면이 담겼다.

    '밥의 인문학'의 저자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식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쌀밥을 많이 먹지 않아도 다양한 영양분을 얻을 수 있게 됐다"며 "시대가 변하고 건강과 영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쌀밥 대신 건강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밥심'의 사전적 의미는 '밥을 먹고 생긴 힘'이다. 여기서 밥은 쌀을 의미하지만, 요즘 한국인의 생활에서 '밥=쌀'이란 등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한국인들의 사라진 밥심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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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샐러드 전문점 ‘피그인더가든’.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는 직장인들로 붐비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밥심 대신 면(麵)심, 빵심

    밥심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은 무슨 힘으로 살아가는 걸까? friday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성인 남녀 1036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밥심’에 대해 설문한 결과 ‘밥 대신 선호하는 음식’으로 ‘면류’(37.45%)라는 답변이 가장 많이 나왔다. 다음으로 ‘빵’(20.56%), ‘고구마·감자·과일 등 자연식’(14.38%), ‘고기’(10.23%)와 ‘시리얼’(6.47%), ‘선식·셰이크 등 간편영양식’(5.6%), ‘샐러드’(5.12%) 순이었다.

    서울 홍제동에 사는 직장인 이지우(32)씨는 ‘빵심’으로 산다. “쌀밥을 먹으려면 밥도 안치고 국이든 반찬이든 못해도 2~3개 이상의 반찬이 있어야 하는데 1인 가구엔 너무 번거로운 일이에요. 빵이나 면처럼 간편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주식이 될 수밖에 없어요.” 빵 종류가 다양해지고 개성 있는 빵집도 늘면서 빵집 투어로 새로운 빵을 공략하는 것도 이씨의 색다른 재미다. 글루텐 프리,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은 빵, 비건 베이커리까지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이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다양하게 빵심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경기도 일산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 김지영(36)씨도 “시간 여유가 있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을 제외하고 빵과 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날이 많다”며 “바쁜 아침 시간에 시간을 절약하고 몇 분이라도 잠을 자기 위한 나름의 생존 방법”이라고 했다.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밥심 대신 면심이나 빵심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도 쌀밥 의존도를 낮추는 원인 중 하나다. 직장인 서진욱(31)씨는 “쌀밥 위주의 식단은 아무래도 식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럿이 어울려 먹어야 하는 일이 많다”며 “주 52시간 근무가 시작된 이후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 샐러드로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업무를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휴식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커피전문점에서도 샐러드와 샌드위치 매출이 늘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올 1~8월 샐러드와 샌드위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5%, 18% 증가했다고 밝혔다. 스타벅스코리아 서규억 홍보팀장은 “커피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인구가 늘면서 카페에서 식사도 함께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1인 가구가 늘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 샌드위치의 매출도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자료=friday,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ion Pro)' 성인남녀 1086명 대상
    자료=friday,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ion Pro)' 성인남녀 1086명 대상
    쌀=다이어트 주적?

    수천 년간 한국인의 주식이었던 쌀밥이 찬밥 신세가 된 이유는 뭘까? friday의 설문 결과 ‘쌀밥을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건강·몸매 관리를 위해서’(32.14%)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밥 외에도 다른 먹을거리가 많아서’(28.57%), ‘시간이 부족하고 귀찮아서’(25%), ‘맛이 없어서’(7.14%), ‘포만감이 커서’(3.57%)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쌀밥은 탄수화물 덩어리, 당뇨병의 주범이란 인식이 생기면서 건강이나 몸매 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쌀밥부터 멀리한다. 그러나 쌀에는 탄수화물 외에 필수 아미노산인 ‘라이신’이 포함된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식이성 섬유소, 마그네슘 등의 영양분이 함유되어 있다. 밥 한 공기(210g) 기준 313㎉로 밥 자체의 열량도 높지 않은 편이다.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박현아 교수는 “실제로 비만이나 혈당 문제로 병원에 오는 환자 중에 밥이 원인인 경우는 거의 없다”며 “쌀은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을 주고 에너지를 내는 에너지원으로 밀보다 혈당을 천천히 올리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싱거운 채식 위주 반찬으로 식단을 구성한다면 건강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한 끼를 즐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건강과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늘다 보니 쌀밥 대신 다른 먹을거리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소셜커머스 티몬에 따르면 닭 가슴살과 곤약밥, 곤약젤리, 모닝죽 등의 매출은 올 1~8월 전년 대비 47% 증가했다.

    밥보다 먹을 게 많아진 것도 쌀밥에 대한 관심이 식은 또 다른 이유다. 소셜 미디어나 ‘먹방’을 통해 새로운 음식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직장인 이주승(35)씨는 “생소한 외국 음식이나 새로운 디저트를 먼저 찾게 되니 자연스레 익숙한 쌀밥은 뒤로 밀리고 만다”고 했다.

    쌀 안 먹으면 찜찜하다?

    조리·식사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간편대용식.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 많다. /CJ올리브네트웍스
    조리·식사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간편대용식.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 많다. /CJ올리브네트웍스
    빵심, 면심, 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도 수천 년간 한국인에게 전해져 내려온 밥심의 DNA가 쉽게 사라질 리 없다. friday가 ‘한국인에게 밥심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7.6%가 ‘그렇다’고 답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면 무엇을 먹겠느냐’는 질문에도 ‘쌀밥’이란 답변이 47%로 가장 많았다.

    경남 거제에 사는 주부 이정라(35)씨는 아이들에게 끼니로 치킨이나 라면을 먹이더라도 쌀밥은 꼭 챙겨 먹인다. “한 끼라도 밥을 안 먹이면 제대로 된 밥을 안 먹이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곤 해요. 김치는 포기해도 쌀밥은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얼마 전까지 아이 식단 문제로 친정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주부 김신영(36)씨의 생각은 다르다. “어른들은 여전히 삼시 세끼, 쌀밥을 많이 먹이려고 하시죠. 아이를 돌봐주시던 친정어머니가 밥 먹지 않으려는 아이와 긴 시간 씨름을 하고 제가 그걸 말리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어요.” 26개월 된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서 식단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삼시 세끼를 챙겨 먹이되 매끼 쌀밥을 고집하지 않는다. “둘째가 밥보다는 빵이나 면을 좋아하는데 한 끼를 먹더라도 좋아하는 걸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해진 양을 억지로 다 먹일 필요도 없고요.”

    쌀이 부족하고 먹는 게 중요했던 30~40년 전만 해도 쌀밥은 한국인의 밥심의 중심이었다. 삼시 세끼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한 시대였던 것. 그러나 이젠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됐다. 양보다는 질의 시대로 바뀐 셈이다.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박현아 교수는 “지금 밥양의 3~4배 이상을 먹었던 조선 후기만 해도 쌀은 유일한 에너지원이자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양껏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며 “시대가 달라진 만큼 쌀밥은 적당량 먹고 건강하게 먹는 식단과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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