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속 아시안, 감초 조연서 감동 주연이 되다

입력 2018.09.05 03:01

[오늘의 세상]
미국 영화계서 달라진 위상

2010년 개봉한 코언 형제 감독의 영화 '시리어스 맨'에는 영어 발음이 시원찮은 한국인 대학생이 등장한다. 교수와 대화하던 그가 "미어 서마이즈, 서(Mere surmise, sir·추측일 뿐입니다)"라고 하자, 교수는 인상을 쓰면서 "미어 서, 마이 서(Mere sir, my sir·단지 교수님, 나의 교수님)?"라고 되묻는다. 이것이 할리우드에서 묘사해 온 동양인의 전형적 모습중 하나였다.

지난달 15일 미국서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Crazy Rich Asians)'는 남녀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출연진을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했다. 싱가포르계 미국 소설가 케빈 콴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중국계 미국 감독 존 추가 연출했다. 남녀가 좌충우돌 끝에 사랑의 결실을 거두는 로맨틱 코미디다. 개봉 후 아시아계 관객들의 관람이 이어졌고, 할리우드의 아시아계 배우들도 영화 홍보에 나섰다. 이 영화는 개봉 후 3주째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약 1억1700만달러(약 1300억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뉴욕타임스는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주연인 영화는 1993년 '조이럭 클럽'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라며 "이 영화는 다양성이 지닌 파워를 입증했다"고 보도했다.

할리우드 속 아시안, 감초 조연서 감동 주연이 되다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의 역할은 대체로 한정적이었다. 어설픈 영어로 억지웃음을 만들어 내거나, 공부는 잘하지만 대인관계는 서툰 '너드(nerd·괴짜)' 또는 무술을 잘하는 역할이 고작이었다. 원작의 동양인을 영화에서는 백인이 맡는 '화이트 워싱(Whitewashing)'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등의 경제·문화적 파워가 크게 커지면서 할리우드 내 아시아계의 역할과 비중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런 영화들이 지난 8월 잇달아 개봉하면서 '아시아의 8월(Asian August)'이란 말도 생겨났다.

최근 한국계 원작자가 동양계 배우를 고집해 관철시킨 일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지난달 17일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넷플릭스에서 개봉해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는 한국계 작가인 제니 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 주인공인 '라라 진'은 베트남계 배우 라나 콘도어가 맡았는데, 제니 한이 영화화 계약 당시 "주인공은 반드시 동양계 배우가 맡아야 한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제니 한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드디어 아시안 스타가 스크린에 뜨다'란 칼럼에서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배우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나는 어떻게 꾸며도 절대 그들을 닮을 수 없었다"며 "영화 속에서 자신과 닮은 배우를 자주 발견하는 경험은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힘을 준다"고 했다.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서치'는 백인이 전담해 오던 역할을 한국계 배우가 맡은 경우다. 이 영화 주연 배우 존 조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이런 역할은 여지없이 백인 남자 배우 몫이었다.

할리우드의 아시아 바람은 미국 사회 내 아시안의 비중에 비해 영화 속 아시안이 턱없이 적은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소비자 구매력은 2000년 이후 257% 증가해 같은 기간 미국 전체 증가율(97%)을 훨씬 웃돌았다. 그러나 남가주대(USC)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흥행 100위 내 영화 중 동양인 캐릭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은 영화가 37편이었다. 로이터는 "미국 내 아시안 사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아시안 캐릭터를 영화에 출연시켜야 한다는 압력도 커지고 있다"고 했다. 김치호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최근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수요를 감안해 제작되고 있다"며 "유색 인종을 내세운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다는 공식이 깨지면서 아시안 캐릭터의 매력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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