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完整' 내세우며 무력 적화통일 공언

조선일보
  •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8.09.05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1] 북한 정권이 수립되다
    北 지도부, 중국 공산화에 고무돼
    남한은 '북진통일론'으로 맞서

    북한 정권의 수립은 언론을 통해 남쪽에도 알려졌다. 남한 신문들은 1948년 9월 10일 통신 기사를 인용해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이틀 전 김두봉 상임위원장, 김일성 내각 수상을 선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11일에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음을 전하고 내각 명단을 게재했다.

    1948년 9월 2일 개막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모습.
    1948년 9월 2일 개막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모습. 북로당과 남로당을 각각 이끄는 김일성(앞줄 오른쪽)과 박헌영(가운데)이 표결에 참여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북한 헌법 제10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다"로 돼 있었다. 수도를 사실상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서울로 규정함으로써 남한이 흡수통일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일성은 수상 취임 직후인 9월 10일 북한 정권의 기조를 밝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政綱)' 8개를 발표하면서 첫째 조항에서 '국토의 완정(完整)'과 '민족의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이를 위한 선결조건으로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를 주장했다. 이어 1949년 신년사에서 "모든 것을 국토완정을 위해 바치자"고 역설하면서 '국토완정'을 13번이나 언급하며 공식적인 통일론으로 제시했다.

    북한 정권이 국토완정을 위한 방법으로 먼저 채택한 것은 '리승만 괴뢰정부를 분쇄하기 위한 영웅적 남조선 인민들의 전인민적 투쟁'이었다. 하지만 남로당이 일으킨 4·3사건과 남한 군대 내부에 숨어 있던 좌익 세력이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남한 각지의 소요가 잦아들자 무력남침을 통해 사회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1948년 11월 북한과 인접한 만주 지역이 중공군 점령 아래 들어가고, 1949년 10월 중국 전역이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받게 되는 상황 변화도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를 고무했다. 북한 정권은 소련과 중공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중공은 중공군의 조선인 부대를 북한군에 편입시켰고, 소련은 탱크와 비행기 등 무기를 지원했다.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해서 역시 북한을 흡수통일의 대상으로 규정한 대한민국 정부는 '북진통일'론으로 맞섰다. 하지만 당시 남한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몰두하던 한국군은 무력을 동원해서 북한을 공격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미국은 대한민국이 북한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을 우려해 군사적 지원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차례 미국에 탱크와 비행기·군함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국 정부와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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