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여전히 울려주네, 조폭과 여의사의 러브스토리

조선일보
  • 이태훈 기자
    입력 2018.09.05 03:01

    돌아서서 떠나라

    조폭 두목과 촉망받는 의사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니. 결혼 상대의 직업별 등급표가 공공연히 만들어지는 요즘엔 절대 나올 수 없었을 작품이다. 게다가 이 조폭은 알고 보면 마음 착한 의리의 사나이고, 여의사는 겉으론 까칠하지만 실은 속정 깊고 여리다. 이보다 더 진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객석은 두 연인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대화에 울고 웃다 끝내 눈물바다가 된다.

    칼을 맞아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조폭 두목 상두도 희주 앞에선 히죽히죽하는 순둥이가 된다.
    칼을 맞아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조폭 두목 상두도 희주 앞에선 히죽히죽하는 순둥이가 된다. /콘텐츠플래닝
    1996년 초연 때 "순수에 대한 향수를 잘 다듬어진 언어로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는 평을 얻으며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던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극작 이만희·연출 김지호)'가 대학로에 돌아왔다. 빠르게 변한 세월에 아랑곳없이 연극적 힘과 정서적 폭발력은 여전하다.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박신양·전도연 주연 영화 '약속'이 1999년 작, 이서진과 김정은이 나온 드라마 '연인'이 2006년 작이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도 이렇게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뜨거워지는 사랑이 희한하지 않았다.

    무대엔 덩그러니 집 한 채. 수인복의 사형수 상두가 수녀가 된 옛 연인 희주와 만나며 두 사람의 회상이 시작된다. 일본 폭력배를 한국에 끌어들이려는 다른 조폭 두목들을 죽인 상두가 2년 반을 도망 다니다, 자수하기 전 희주를 만나러 온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온몸에 칼이 찔린 채 병원에 실려온 환자와 주사도 제대로 못 놓는 인턴 1개월 차 의사로 만났던 시작부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두 사람의 연애는 짧고 뜨거웠다. 이별을 앞둔 하룻밤 속으로 그 굴곡이 녹아든다.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등을 쓴 극작가 이만희는 재치와 정서적 깊이를 함께 지닌 긴 대사를 짧게 끊어치도록 쓰는 데 탁월하다. 고풍스럽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가슴을 파고든다. 두 사람은 "진구덩이에 빠지듯, 벼락에 맞듯, 미친개에게 물리듯" 사랑했고, 연락을 끊었던 상두에게 희주는 "나를 잊는 것만 배신이 아니고 네 마음에서 제쳐놓는 것도 배신"이라며 가슴을 친다. 곁을 떠나 있는 동안 희주가 그리워 "한 달쯤 눈이 안 보이는 벌을 받았다"는 상두는 하루 세 번씩 죽음을 떠올렸다. "포식했을 때, 즐거울 때, 이별을 떠올릴 때"다.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부케 삼아 올리는 둘만의 결혼식, 차곡차곡 쌓아올린 기쁨, 슬픔, 서러움, 안타까움이 결말에 이르러 끝내 둑 터진 봇물처럼 객석을 휩쓴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콘텐츠그라운드에서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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