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올림픽 한국과 일본의 남자 축구 동메달 결정전. 23세 이하가 출전하는 올림픽에 와일드카드(24세 이상)로 뽑힌 박주영(당시 27세)이 전반 38분 절묘한 드리블로 일본 수비수들을 농락하고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구차철의 쐐기골로 일본을 2대0으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주영은 그렇게 한국 축구에서 가장 빛난 와일드카드로 남게 됐다.
하지만 와일드카드는 그동안 '잔혹사'가 더 많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와일드카드로 뽑혔던 홍명보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는 대회 직전 부상으로 낙마했다. 홍 감독을 대신해 강철이 합류했지만, 기존 선수들과 호흡에 문제를 드러내며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선 와일드카드 이영표가 승부차기를 실축하며 금메달 꿈을 놓쳤다. 믿었던 이천수가 1골에 그치고 김동진이 부상으로 한 경기밖에 못 나온 2006 도하아시안게임도 와일드카드 활약이 아쉬운 대표적 대회다. 2016 리우올림픽 8강전 당시엔 와일드카드 손흥민이 소나기 슛을 퍼부었지만 골망을 가르지 못하며 온두라스에 0대1로 패했다.
'와일드카드 잔혹사'라는 표현은 이번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팬들은 '역대 최강의 와일드카드'라 부르고 있다. 김학범 대표팀 감독이 뽑은 손흥민·황의조(이상 26), 조현우(27) 등이 연일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스트라이커 황의조는 6경기에서 9골을 몰아넣는 골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선수가 보여준 역대 단일 대회 최고 활약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손흥민은 '특급 도우미'로 변신했다. 최전방 황의조를 받치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은 손흥민은 1골 3도움을 기록했다. 대회 기간 무릎을 다친 조현우는 투혼을 발휘하며 4경기 1실점의 철벽 선방을 펼치고 있다.
한국은 1일 오후 8시 30분 결승전(인도네시아 보고르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일본을 꺾으면 금메달을 목에 건다. 2014 인천 대회에 이어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연패 달성이 눈앞에 있다.
금메달의 명예에 더해 선수들을 한발 더 뛰게 하는 건 병역 특례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선수들에겐 큰 동기 부여가 된다. 손흥민과 황의조, 조현우는 이번 아시안게임이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공격수인 손흥민이 병역 문제에 직면하면서 한국의 금메달 달성 여부는 BBC와 CNN 등 세계 유력 언론이 주요 뉴스로 보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이 일본과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국제 축구대회 결승에서 한국과 일본은 10번 만났고 한국이 4승3무3패로 약간 앞서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와일드카드 3인방이 주축인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2020 도쿄올림픽에 대비해 와일드카드 없이 21세 이하 선수로만 팀을 구성했다. 이번 대회에 일본이 보여준 기량으론 한국이 방심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꺾을 수 있는 상대이다.
결승전을 하루 앞둔 31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김학범 감독은 "선수들이 차분하게 준비를 잘해서 경기에 임할 것이다. 선수들을 믿는다"고 했다. 함께 참석한 손흥민은 이렇게 각오를 밝혔다. "결승전까지 어렵게 온 만큼 선수들도 준비를 잘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첫 경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하자고 했다. 나부터 솔선수범하며 희생할 것이다. 우리 선수들 눈빛을 보면 준비됐다는 게 잘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