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경기 하강의 굉음을 내고 있다. 고용, 투자 등 주요 경제 지표가 일제히 한국 경제가 역(-)성장했던 글로벌 금융위기, 심지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소비심리와 기업체감심리도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다.

조선 자동차 등 전통 주력 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문재인 정부의 몰아치기식 친노동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이 속출하면서 경기 활력이 뚝 떨어진 결과다. 미국 등 선진국 경기가 호조를 보이는 상황에서 주요국 중 한국만 역주행하고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홀로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산업도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올들어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반도체 업종의 설비투자도 크게 꺾이는 모습이다. JP모건, 모건스탠리 등 해외 증권사를 중심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실적 악화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반도체 착시현상이 서서히 걷히면서 한국 경제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라는 우려감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 증가세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대외불안 요인들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간 무역갈등이 좀처럼 봉합되지 않고 있는 데다 신흥국 금융불안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 추락한 주요 경제지표...경기 하강 신호 뚜렷

통계청이 31일 발표한 ‘2018년 7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고용 및 경제 활력과 직결되는 설비투자가 전월대비 0.6% 감소하면서 5개월 연속 뒷걸음질쳤다. 설비투자 감소세가 이처럼 오랜기간 지속된 것은 IMF 외환위기 전후인 1997년 9월~1998년 6월 이후 처음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지난해 설비투자를 이끌었던 반도체 업체들의 설비증설이 마무리되면서 각종 투자 지표가 둔화세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6830만달러였던 일평균 반도체제조용기계 수입은 1년만인 올해 7월 3510만달러로 반토막났다. 향후 설비투자 동향을 가늠할 수 있는 국내 기계수주도 전년동월대비 10.4% 감소했다.

투자 경기의 또 다른 한 축인 건설투자도 얼어붙었다. 건설 경기를 보여주는 건설기성은 전월대비 0.1%, 전년대비 7.0% 줄었다. 정부의 규제 강화로 사무실·점포 및 주택 수주 부진이 심각하다. 건축, 토목공사 실적은 각각 전년대비 6.1%, 9.9%씩 감소했다.

반면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FDI) 규모는 급증하고 있다.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 등 문재인 정부가 쏟아내는 친노동정책 등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기업의 해외직접투자 송금액은 전년 대비 11.8% 증가한 437억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해외직접투자도 크게 늘어 지난해 75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년대비 21%(13억달러) 증가한 것으로 중소기업의 해외직접투자는 3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고용 상황은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로선 처참한 수준이다. 매달 20만~30만명은 ‘보통’이라고 여겨졌던 취업자수 증가폭은 올해 2월부터 10만명대로 추락하더니 급기야 7월엔 5000명으로 쪼그라 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고용 시장이 마비됐던 2010년 1월(-1만명) 이후 8년6개월만에 최악의 수준이다. 심지어 취업자수 증가폭이 마이너스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감마저 나온다. 취업자수 증가폭이 6개월 연속 10만명대 이하로 곤두박질친 것은 IMF 위환위기 직후인 1999년 6월~2000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실업자수는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7개월 연속 100만명을 넘었다. 생산인구감소로 취업자 증가수가 부진했다는 정부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경제의 허리를 떠받치는 40대 일자리도 IMF 외환위기 직후 수준으로 감소해 14만7000개나 사라졌다.

조선DB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도 발생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도 지난 2분기 소득 하위 20%와 하위 20~40%, 40~60% 가구의 소득은 각각 7.6%, 2.1%, 0.1%씩 감소했다. 중산층 이하 가구 소득이 죄다 준 것이다. 반면 소득 상위 40%(4~5분위)의 소득은 1년새 4~10% 대폭 증가했다.

그 결과 올해 2분기 소득 상하위 격차를 나타내는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5.23배를 기록했다. 2분기 기준으로 소득 양극화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로 벌어졌다.

향후 3~6개월 이후 경기흐름을 예고하는 경기선행지수 순환변동치는 2016년 8월 이후 23개월 만에 기준선 100 아래로 떨어졌다. 7월 선행지수가 100아래로 내려간 것은 경기가 하강국면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현재 경기흐름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도 지난해 12월 이후 8개월째 기준선 100아래에 머물렀다. 통계청 관계자는 "경기선행지수와 동행지수 하락세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경기에 부정적인 신호"라고 말했다.

최근 조선비즈가 국내 금융회사, 경제연구기관, 주요 대학 등에서 활동하는 경제 전문가 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에서도 한국 경제가 하강 국면에 진입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경제전문가 19명 중 14명(74%)이 한국 경제의 상황을 ‘경기하강 국면 진입이 임박했거나, 이미 진입했다'고 판단했다. ‘잠재성장률 이상의 경기회복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진단과는 달리 상당수 경제전문가는 한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고 본 것이다.

◇ "주력 산업 위기인데 산업 정책 없어...소득주도성장 원점 재검토해야"

일러스트=조선일보

더 큰 문제는 금융위기나 외환위기 같은 돌발 악재가 없음에도 한국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위기의 원인을 주력 산업의 경쟁력 저하에서 찾고 있다. 조선비즈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은 경기 하강의 원인으로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등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부작용,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로 인한 생산성 둔화가 뒤를 이었다. 세계 경제가 양호한 회복세를 보이는 가운데서도 한국 경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은 외부 충격보다 내부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이 조정 국면에 들어가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산업은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국 경제가 3.1% 성장할 때 반도체 업종의 기여도는 0.4%포인트에 달했다. 반도체 업종 하나가 한국 수출의 20%, 설비투자의 20%, 전체 기업 영업이익의 25%를 차지했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 착시현상으로 도배된 셈이다.

수출 및 기업 실적에서 반도체를 제외하면 한국 경제의 민낯은 곧바로 드러난다.

유가증권시장 12월 결산 상장법인 536개사의 올해 상반기 매출액과 순이익이 전년동기대비 5.3%, 1.2%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매출 증가율은 5.1%로 둔화했고 순이익은 오히려 7.3% 감소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1~7월 누적 수출은 전년동기대비 6.4% 늘어난 3491억달러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증가율이 0.2%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와 조선업 부진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현대차를 비롯한 국산차의 경쟁력 약화와 수출 부진, 한국GM의 구조조정 등이 제조업 침체를 불러오고 있다. 올해 1분기(1~3월) 팔리지 않아 쌓인 자동차 악성 재고율은 전년 동기대비 36.7%포인트 급등한 153%를 기록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평균 자동차 재고율(159.1%)과 맞먹는 수준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에서는 이같은 주력 산업 위기를 돌파할 방안을 찾아볼 수 없다. 고용쇼크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을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 퍼붓기에 나서고 있을 뿐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총지출) 규모를 올해 보다 9.7% 늘려 470조5000억원의 수퍼 예산을 편성했다. 이같은 증가율은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10.6%) 이후 최대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한국 경제는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지속되고 있고, 이로 인해 내수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며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자동차와 조선 업종 등을 위한 산업 정책이 나오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뒤늦게 규제완화 혁신성장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친노동 반기업 정책과 대기업을 적폐로 보는 시각이 교정되지 않는 한 기업의 투자가 살아나기 어렵다"며 "소득주도성장 등 전반적인 정책이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