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각)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訪北)을 전격 취소하면서 이미 일정 조율 단계까지 접어든 남북 정상회담과 개성 공동 연락사무소 개소식 등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청와대·정부는 이날 "촉진자·중재자로서 (우리 측의) 역할이 더 커졌다"며 "(판문점 선언 등) 남북 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충실히 이행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방북을 취소한 이유가 '비핵화 측면에서 진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미·북 관계 개선 없이 남북 관계만 '과속(過速)'으로 비칠 경우 오히려 한·미 공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靑 "촉진자·중재자 역할 더 커져"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청와대 관저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무산과 관련한 관계 부처 장관들의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의용 안보실장, 강경화 외교장관, 조명균 통일장관, 서훈 국가정보원장으로부터 북·미 간 현 상황에 대해 각각 보고를 받았다. 임종석 비서실장도 여기 참석했다. 청와대는 "종합적인 상황 판단을 공유했다"며 "향후 북·미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그 대책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이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무산으로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은 더 커진 것 아닌가 싶다"며 "북·미가 경색된 상황에서 막힌 곳을 뚫어주고 북·미 사이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문 대통령의 촉진자·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진 게 객관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차질 없이 진행한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김 대변인은 "그렇다. 그런 구도 속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일정과 안건들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고 북·미 두 정상 모두 대화 동력을 살려나가려고 하는 의지는 여전히 높다"고 했다. 이어 "남북 정상회담도 북·미 대화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의제 문제도 정해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의 방북 무산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의제'를 새롭게 조율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측에 주어졌다는 분석이다. 당초 청와대는 폼페이오 방북 뒤 남북 정상회담 일정과 안건을 구체화할 예정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이 비핵화 진전을 이뤄낼 경우,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경제협력 논의 등이 그만큼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대를 더 이상 하기 어렵게 된 만큼, 미국에 맡기려던 '북한의 진전된 비핵화 의지'를 문 대통령이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이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 간의 의제 조율에서 남북 경제협력을 축소하고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면 북한이 반발하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남북 정상회담 후 비핵화 논의가 충분하지 못했다든가, 남북 경협이 지나치게 강조됐다는 평가가 나오면 이 또한 청와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연락사무소 개소 연기될 수도
정부는 이달 내에 개성공단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개소를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연기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김의겸 대변인은 이날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 간 상황 인식을 위해 지금 긴밀히 소통·협의 중"이라면서 "공동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고 그런 구도 속에서 남북 연락사무소 문제도 배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이번 주 연락사무소를 개소한다는 목표에 변함이 없다. 북측과 개소식과 관련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다만 8월이 이제 한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준비에 시간이 필요해 물리적 여건상 이번 달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개소를 '비핵화 진전 이후'로 조금 늦춰 달라는 뜻을 밝혀왔다. 지난 23일(현지 시각)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은 "(연락사무소로 반출된 물자들이 제재 위반인지) 들여다보겠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예전에 남북 관계는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별개로 진전될 수 없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가 제재 위반 가능성까지 거론한 것은 북한의 비핵화 진전 이전에 남북 관계가 너무 앞서 나감으로써 미·북 협상에 영향을 주지는 말아 달라는 뜻을 완곡히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도 폼페이오의 방북 이후 연락사무소 개소 일자를 확정하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