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건물에 인화물질 빼곡...'화재위험' 안고 사는 남동공단에 또 불

입력 2018.08.21 21:40 | 수정 2018.08.21 22:33

‘화약고’ 인천 남동공단서 또 큰 불
"가연성 물질 취급업체 많아 대형화재 취약"
9명 사망·6명 부상, 전자부품업체

21일 오후 3시 43분쯤 인천 남동공단에 자리한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업체 4층 검사실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았다. 황토색 연기가 삽시간에 주변으로 번졌다. "불이야!" "대피하세요!" 고함이 터져 나왔다.

21일 오후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전자부품 제조업체 세일전자에서 화재가 발생, 9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인천소방본부 제공
전자회로기판을 만드는 이 공장에는 각종 화학물질이 저장되어 있었다. 유독가스가 건물 내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화재 초기 대피하지 못했던 일부 근로자는 소방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4층에서 뛰어내렸다. "비명소리가 들려서 밖을 내다봤더니, 양말만 신은 사람들이 멍하게 불이 난 공장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아비규환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목격자 진모(38)씨 얘기다.

이날 화재로 공장 근로자 9명이 숨졌고, 6명이 다쳤다. 소방당국은 이날 대원 228명과 함께 펌프차와 구급차 등 차량 62대를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인천 공단소방서 관계자는 "화재가 발생한 공장은 소방서 지척이어서 큰 불길은 45분 만에 잡혔다"면서 "그러나 유독가스는 소방대원들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번져 인명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화재 위험’ 안고 사는 남동공단
불이 모두 꺼진 이날 오후 8시, 화재가 발생한 남동공단 입주업체 세일전자 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조명이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소방대원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피해자가 있는지 내부수색에 한창이었다.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세일전자 4층에 있던 근로자는 모두 23명으로 파악된다. 현재까지 이 가운데 15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 밖의 8명은 초기에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 관계자는 "현재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내부수색을 진행 중"이라면서 "사상자 제외 나머지 근로자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동공단은 국내 최대 중소기업전용 국가산업단지다. 남동공단에는 6630여개의 중소기업이 밀집되어 있는데, 가연성 물질을 취급하는 업체가 많아 대형화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공단엔 다른 산업단지처럼 샌드위치 패널 구조로 지어진 공장이 많다. 건축물 자재로 많이 쓰이는 샌드위치 패널은 가격이 저렴하지만, 철판 사이에 있는 스티로폼은 불이 붙으면 급격하게 연소하고 유독성 가스를 발생시킨다. 2015년 발생한 의정부 아파트 화재 당시에도 샌드위치 패널 때문에 피해가 컸다. 소방당국은 공장 4층 내 패널 구조로 된 검사실 천장에서 처음 불이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1일 남동공단 화재 현장에서 119구급대원들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소방본부 제공
국내 한 자동차부품 업체 대표는 "남동공단은 지난 1980년 산업단지로 지정돼 조성된 지 30년이 훨씬 넘어 노후한 생산설비가 밀집했다"면서 "화재에 취약한 가건물이 많아, 한 번 화재가 발생하면 피해가 클 수 있다"고 했다.

지난달 30일에도 남동공단에 입주한 화장품 제조업체에서 불이 나 3명이 다쳤다. 당시 화장품 공장 내부에서 작업하던 근로자 36명이 신속히 대피해 화(禍)를 면했지만, 업체는 5억원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불길·유독가스 번져 대피 못했다
소방당국은 빠르게 번진 불길이 내부 근로자의 대피로를 막은데다, 동시에 번진 유독가스가 치명적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 발화지점인 4층 창문 밖으로 짙은 황토색 연기가 구름처럼 번졌다. 천장이 무너져 내려 대피가 어려웠다. 일부 시신은 무너져 내린 천장 안에 파묻혀 있었다고 소방 관계자는 전했다.

사망자 9명 가운데 7명은 화재 발생 직후 미처 공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머지 사망자 2명은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4층에서 뛰어내렸다가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소방 관계자는 "부상자 6명이 유독가스를 마신 상태라, 추가 인명피해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1일 오후 3시 43분쯤 불이 난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남동공단의 한 전자제품 공단. 이날 오후 8시 현재 화재가 발생한 공장 4층이 거멓게 그을려 있다. 소방당국은 내부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소방본부 제공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인천 논현경찰서와 합동 감식을 실시하고, 목격자와 참고인 진술을 벌여 화재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내일쯤 추정되는 화재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중소기업, 2016년 법정관리
불이 난 세일전자는 1989년에 설립된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업체다. PCB는 컴퓨터, TV, 스마트폰, 카메라, 자동차 계기판의 중심부품이다. 세일전자는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BMW, 혼다 등에 부품을 공급했다.

PCB를 만드는 소재로는 플라스틱 계열인 페놀수지, 에폭시수지 등이 사용된다. 이 소재들은 불에 닿으면 유독가스를 내뿜는 ‘위험물질’이다. 세일전자 공장부지는 6111㎡(약 1852평) 규모로, 옥내 저장소 4곳에는 위험물질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일전자의 종업원 수는 350여명, 작년 매출은 1064억원 정도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매출과 고용이 급성장하는 고(高)성장형 중소기업"이라며 남동공단에 자리한 세일전자를 두 차례나 찾기도 했다. 한 때 매출 2000억원에 육박한 탄탄한 중견기업이었지만, 생산설비를 크게 늘리는 등 수요예측에 실패하면서 2016년 자금난을 버티지 못하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회사 홈페이지는 21일 밤 현재 접속자 폭주로 다운된 상태다.

21일 인천 남동공단 세일전자 화재현장에서 사망한 희생자를 소방관들이 수습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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