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37]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조각품

조선일보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18.08.21 03:10

1951년생 남아프리카 출신의 미술가 윌럼 보쇼프(Boshoff). 그는 속이 어렴풋이 보이도록 철사로 된 상자 속에 서로 다른 다양한 형태를 가진 나무 조각품들을 만들어 하나씩 넣고 받침대에 얹어 뒀다. 매끈한 곡선과 부드러운 표면의 추상적인 형태를 한 조각품들은 꼭 한번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수작(秀作)들이다.

윌럼 보쇼프, 블라인드 알파벳 D~E, 2007년, 나무, 철사, 알루미늄, 철 등, 각 72×35×50.5㎝, 개인 소장.
윌럼 보쇼프, 블라인드 알파벳 D~E, 2007년, 나무, 철사, 알루미늄, 철 등, 각 72×35×50.5㎝, 개인 소장.
조각의 제목은 A부터 순서대로 이어지는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붙였다. 문제는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은 물론 영미권의 지식인들도 흔히 쓰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일례로 'Drusiform'은 국내 어학 사전에는 아예 없고, 인터넷을 뒤져보고 나서야 수정(水晶)의 결정 중 어떤 형상을 일컫는 단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보쇼프는 상자의 뚜껑에 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써 붙였다. 단, 시각장애인들만 읽을 수 있도록 브라유 점자(點字)로 말이다.

작가가 1995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이 '블라인드 알파벳'은 글자 그대로 시각장애인들만 손댈 수 있고, 그들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뚜껑을 열어야 만질 수 있는 조각 작품이다. 볼 수 있는 관객들, 곧 평소 미술관에서 무엇이든 실컷 보고 느꼈을 이들은 눈앞에 작품을 두고도 볼 수가 없고, 봐도 본 게 아닌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흔히 '눈[眼]의 신전'으로 불리는 미술관의 문턱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늘 다수로부터 동떨어진 고립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다수의 관람객들에게 소수가 겪어온 좌절을 돌려주는 보쇼프는 "'시각 장애'란 '색맹'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종차별 정책으로 피부색이 중요한 남아프리카의 미술가 보쇼프에게는 겉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특히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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