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무관심이 거대 악을 만들었다"

조선일보
입력 2018.08.18 03:02

나치 선동가 괴벨스 비서의 증언록… 정권 몰락 70년 후 다큐에서 회고
"유대인 학살 몰라… 난 책임없어" 그 시대 살았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어느 독일인의 삶

어느 독일인의 삶

브룬힐데 폼젤 지음·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열린책들|328쪽|1만5000원

그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엄청나게 강한 여자였다. 전쟁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 1945년 러시아가 베를린을 습격해 나치 정권이 몰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선전부 지하 방공대피소에서 최후의 나치 추종자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버티기로 결정했다. 신경 날카로운 여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에 맞았다가는 목숨이고 뭐고 다 끝장이야!" 할 때마다 그는 소리 질렀다. "우리는 죽지 않아! 나는 살고 싶어! 폭탄에 맞아 죽고 싶지 않다고!"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직속상관이었던 괴벨스도 자살했다. 모든 게 끝났다 싶었다. 식량 자루를 찢고 잘라 흰색 깃발을 만들었다. 항복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군에 체포돼 특별수용소에 수감됐고, 5년 후 풀려났다.

브룬힐데 폼젤(1911~2017)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선전부에서 요제프 괴벨스를 위한 속기사로 일했다. 말단 비서직이었다.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제국방송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치 당원이 되었다. 정치에 무관심했으나 상사가 입당을 권유했다. 나치건 유대인이건 상관없었다. 그녀는 좀 더 후한 봉급을 주는 쪽에서 일했다.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제국방송국으로 옮기기 전인 1932년 말 무렵엔 오전엔 유대인 보험 중개상 사무실에서 일하고, 오후엔 나치 당원의 회고록을 타이핑했다.

군(軍)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요제프 괴벨스. 폼젤은 나치 선동가 괴벨스에 대해 “잘생기고 아주 잘 꾸미고 다녔다. ‘총력전’을 부르짖은 1943년 베를린 체육관 연설에서 수백수천 명을 동시에 일어나 함성과 환호를 지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군(軍)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요제프 괴벨스. 폼젤은 나치 선동가 괴벨스에 대해 “잘생기고 아주 잘 꾸미고 다녔다. ‘총력전’을 부르짖은 1943년 베를린 체육관 연설에서 수백수천 명을 동시에 일어나 함성과 환호를 지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책은 '최후의 나치 수뇌부 증언자' 폼젤이 102세인 2013년부터 2년간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근거한다. 폼젤은 엄격한 부모 아래 순종적으로 자란 순진하고 성실했던 처녀가 거대한 악을 위해 충직하게 일하게 되는 과정을 담담히 진술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그저 시대에 끌려 다녔을 뿐이에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탄압받던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강조한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야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았으며, 괴벨스 아래에서 문서 작업을 할 땐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난 책임이 없어요. 나치가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약간 선택받은 느낌'과 함께 '어리석게도 껍데기로만 살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시키는 일만 했을 뿐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는 여자.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와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질문과 팽팽한 긴장을 안겨준다. 다큐멘터리 시사회에서 기자들과 관객은 폼젤에 대한 일방적 매도를 경계했다. "완전히 잘못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호도한 나치 자신들, 즉 나치 지도부만 빼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건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는 폼젤의 말처럼 대개의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며 주변 상황에는 무관심하니까.

책을 엮은 독일 정치학자 토레 D. 한젠은 폼젤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건 거짓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증언을 해석한다. 폼젤에겐 어머니가 유대인이라 나치 인종법의 대상이 된 애인이 있었고, 그 애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한젠은 폼젤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한젠이 경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개인이 도덕적 붕괴에 빠지고, 이로 인해 인종주의가 다시 유럽을 뒤덮게 되는 것이다. 시리아 난민으로 인한 갈등, 브렉시트, 오스트리아 극우 세력의 부상처럼.

한젠의 우려는 옳다. 그러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폼젤의 말도 무시할 수 없다. "저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은 세계 정치 같은 큰 문제를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아니었어요. 우리한테 그런 건 먼 세상 이야기였죠." 그리하여 책은 우리를 갈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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