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비즈 권하면서 반바지는 왜 안 되나요?

입력 2018.08.10 14:00 | 수정 2018.08.10 15:39

회사는 허용해도, 부서장이 싫어해…사실상 규제
‘격식 없어’ VS ‘취향의 문제’ 세대별 시각차 커

남자 직장인이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일까? 많은 기업이 여름철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지만, 아직 반바지를 착용하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핀터레스트
미국 패션 디자이너이자 영화 ‘싱글맨’을 만든 영화감독 톰 포드(56)는 “남자는 도시에서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반바지와 슬리퍼는 테니스장이나 해변에서만 착용해야 하는 것이라며. 그에게 권하고 싶다. “톰 포드씨, 여름에 한국에서 일주일만 살아 보시겠어요?”

◇ 男 직장인, 반바지 안 입나? 못 입나?

올여름 40도에 육박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면서 남자 직장인들의 ‘반바지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직장인들이 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기록적인 폭염에도 왜 반바지를 입지 못하는가?’ ‘반바지를 입으면 품위가 없는 것인가?’ 등의 게시물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올라온다. 급기야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반바지 입고 출근하게 해달라’는 청원 글이 수차례 등장했고, 한 청원자는 “대통령이 반바지를 입어 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직장인들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기업은 여름철이면 ‘쿨비즈(Cool-biz)’를 권장한다. 넥타이를 풀고 간소한 옷차림을 하라는 것인데, 아직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고 회사에 가는 건 일부 직장인을 제외하고는 낯선 일이다. 서울 종로, 여의도, 테헤란로 등 기업 밀집 지역을 가봐도 반바지 입은 남자 직장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네이버, 카카오 등 IT(정보통신) 기업을 비롯해 삼성전자, SK, LG전자 등이 반바지 착용을 허용한다. 하지만 많은 직장인은 “공식적으로 반바지를 허용하더라도, 비공식적으로는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유는 단순하다. 반바지 입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 공식적으론 “OK”, 비공식적으론 “반바지는 좀…”


조선DB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2)는 “자율복장을 권하지만, 막상 반바지를 입으면 선임 중 하나는 ‘놀러 왔냐?’고 훈장질을 한다. 사실상 규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박모 씨(35)도 “회사에선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입으라고 공문을 내렸지만, 반바지를 예의 없는 것으로 보는데 어찌 입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반바지를 반대하는 입장도 할 말은 있다. 격식에 어긋나고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게 이유다. 공기업에 다니는 이모 씨(50)는 “옷차림이 자유로우면 자세가 흐트러지고 진지하게 일하기 어렵다. TPO(때(time), 장소(place), 경우(occasion)에 맞춰 옷을 입는 것)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정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옷차림이 업무 효율을 높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장을 입는 것이 캐주얼한 옷을 입는 것보다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예일대 연구팀이 18세에서 32세 사이의 남성 128명을 대상으로 모의 협상을 하도록 했는데, 정장을 입은 그룹은 평균 21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트레이닝 팬츠와 샌들을 신은 그룹은 평균 68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하지만 이 실험 결과가 어디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구글과 애플 등 잘 나가는 IT 기업들은 모두 반바지를 비롯한 자율 복장을 허용하니 말이다. 이들은 복장과 업무 환경 등이 자유로울수록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2016년 반바지 착용을 허용한 삼성전자도 격식에 얽매이지 말고 창의성을 발현해 보라는 의미로 복장 규제를 완화했다.

◇ 반바지 인식, 세대 차 커…

시대가 바뀌었지만, 한국의 일터에서 예의를 따지는 문화는 여전하다. 반바지 ‘못 입는’ 문화가 만들어진 이유다. 하지만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선 폭염에 맞서고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관습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요즘같이 더운 날엔 회사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 빠진다. 중요한 미팅이나 회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반바지를 허용을 해주면 좋겠다(제약회사 직원 김모 씨, 33세)” “직원들에겐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것을 강조하면서 옷차림은 규제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C기업 직원 장모 씨, 34세)”

예의가 중요한 한국의 일터에서 반바지 입는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임원이나 부장이 먼저 나서 반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진은 미국의 패션 디렉터 닉 우스터(59)와 염태영 수원시장./핀터레스트, 수원시청
한 중견기업 차장(43)은 “신입 남자 직원이 왜 반바지가 안 되냐고 물었는데, ‘그냥 사장님이 싫어해서…’라고 얼버무렸다. 사실 영업직 아니고서야,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자유롭게 입어도 되지 않나”라고 했다.

사장이나 임원이 먼저 반바지를 입지 않는 한 문화가 바뀌기 어려울 것이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에 염태영 수원시장은 시청 직원들과 함께 지난 7일부터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게 반바지는 취향의 문제다. 디자이너 문모 씨(34)는 “어지간한 몸매가 아니고는 반바지를 멋지게 소화하기 어렵다. 다리털도 관리해야 한다. 신경 쓸 자신이 없어 긴바지를 입는다”라고 했다. 편한 옷차림에 불편함을 느끼는 직장인도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28)는 “반팔티에 반바지 입고 출근하는 선배들을 보면 동네 아저씨 같아서 보기 민망하다. 입더라도 잘 입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간호섭 홍익대학교 섬유패션미술학과 교수는 “직장인의 옷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규범과 조직의 분위기에 맞추는 것이다. 반바지 역시 자신이 속한 조직이 용인해야 가능한 것”이라며 “반바지를 입더라도 리넨 셔츠를 입거나 양말에 로퍼를 신는 등 어느 한 요소에 격식을 갖춰 균형감을 맞추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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